[김성호 세상보기]멜 깁슨의 정계개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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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영화 '콘스피러시' 에 나오는 멜 깁슨은 뉴욕의 택시 운전사다.

그의 유일한 취미는 매일 호기심을 끌 만한 신문 뉴스에 밑줄을 그어 가며 전후 관계를 종합, 분석하는 일이다.

그 나름대로 내리는 결론이 항상 음모이론 (conspiracy theory)에 입각한 것뿐이다.

가령 미국 대통령이 지진이 발생한 터키를 방문하는 데는 미 항공우주국 (NASA) 의 암살 음모가 개재됐다고 믿는 것이 그 한 예다.

그가 최근 한국의 정계개편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일개 할리우드 배우가 복잡미묘한 한국 정계의 내막을 어떻게 추측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멜 깁슨을 잘 모르고 하는 소리다.

그는 95년에 주연.감독한 영화 '브레이브 하트' 에서 당당히 아카데미 감독상을 탄 사람이다.

유능한 영화감독이자 음모이론의 대가 (大家) 인 그도 그러나 한국의 정계개편에 대해서는 음모보다 의문과 추리에 가까운 분석을 시도하고 있다 (아, 한국 정치는 너무 컴컴해) . 우선 그는 정계개편의 근본적 동인 (動因) 으로 한국에서 대통령이 지배하는 정부와 대통령 반대당이 장악한 국회는 평화 공존을 누릴 수 없다는 점을 든다.

또 동 (東) 고향당과 서 (西) 고향당의 구별을 없애고 전국당을 만들려는 조급성도 한 원인으로 꼽는다. 그러나 직접적 원인은 야당이 여당의 발목을 잡아당기기 때문인 것으로 의심한다.

발목을 잡아당기는 이유는 '같이 살자' 고, 다시 말해 동거 (同居) 나 공생 (共生) 을 바라기 때문이 아니다.

야당 대변인 왈 "아니, 여당 발목이 무엇이 예쁘다고 잡아당깁니까. 미운 사람과도 같이 사나요" 했다.

여당 대변인도 "어떻게 같이 살 수 있나요, 사사건건 개혁을 방해하고 있는데. 마치 딴나라당 사람 같다니까요" 했다.

그러면 공사 (共死) 를 위한 잡아당김?

발목을 잡아 끄는 힘은 바로 원내의석수와 비례한다.

원내 의석이 많을수록 커지고, 반수를 넘으면 절정에 이른다.

정계개편의 또다른 이름인 거야 (巨野) 과반수 허물기는 이 때문에 시작됐다는 것이 멜 깁슨의 추리다.

과반수 허물기는 의원 영입을 통해 달성되는데 여기서 파울 플레이 이론이 등장한다.

선거에 의하지 아니한 과반수 허물기조차 그 정당성이 의심되는 터에 영입 교섭에 무슨 리스트를 활용한다는 소문이 자자하다.

리스트는 기업의 비자금 사용 리스트와 검찰의 소환 리스트가 대종을 이룬다.

이처럼 리스트를 활용하는 것을 외곽 때리기 또는 검찰정치라고 부른다 (외곽을 때리는데 왜 중심이 움직일까, 정말 신비롭다) . 어쨌든 이런 식의 개편은 반칙이라는 반발을 받고 있다.

반칙게임의 폐해는 한국 - 멕시코 월드컵 축구전에서 그 위력을 드러냈다.

상대선수를 뒷다리걸기로 넘어뜨린 벌로 선수 1명이 퇴장당한 한국 팀은 1대3으로 역전패해 전 국민을 경악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정치나 축구나 반칙게임에 익숙한 이유는 무엇일까. 멜 깁슨의 추리는 바로 한국의 냄비 언론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왕이면 한국 축구가 16강에 들었으면 좋겠다는 소박한 희망도 냄비 언론이 한번 끓여 대면 이윽고 '국민적 염원' 이 된다.

신중을 기하겠다는 과반수 허물기도 냄비 언론을 거치면 '초읽기' 가 된다.

국민적 염원에 부응하고 초읽기에 맞추려면 까짓 반칙을 겁낼 것인가.

멜 깁슨의 추리는 더 나아가 의원 영입의 원리를 찾아 낸 데서 더욱 빛난다.

자기당 탈당의 원리인 '철새론' 에 버금가는 반대당 입당의 원리는 '드렁칡론' .간단히 소개하면 이렇다.

"한국 정치인은 드렁칡이다. 드렁칡은 얽어져 백년까지 누린다.고로 한국 정치인은 얽어져 백년까지 누린다. "

김성호<객원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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