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일본식 장기불황으로 간다는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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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박승 한국은행 총재는 그제 국회에서 열린 심포지엄에서 "우리 경제가 1990년대 이후 일본의 장기침체 때와 닮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 간접화법을 동원했지만 그동안 우리 경제가 일본식 장기불황으로 갈 가능성이 작다고 주장했던 박 총재가 한발짝 물러나 경제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경고한 것이다.

일본이 지난 10여년 동안 장기불황에 시달린 것은 80년대의 부동산 및 주식 거품이 붕괴된 때문이었다. 그러나 우리 경제의 장기불황 조짐은 성장잠재력 훼손에서 비롯되고 있다는 점이 더 걱정스럽다. 노사분규 등 이익집단의 목소리가 갈수록 거세지고 기업규제는 여전한 가운데 사회갈등이 첨예해지고 있어 경제현장의 활력이 크게 떨어지고 있다. 일본은 '잃어버린 10년' 동안에도 제조업의 경쟁력을 유지하면서 결국 회생의 발판을 마련했다. 하지만 우리 경제는 장기불황에 빠질 경우 자칫 회생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앞서는 것도 이처럼 경제활력이 급격히 위축되고 있기 때문이다.

박용성 대한상의 회장이 같은 자리에서 정치권과 정부의 반(反)기업적인 정책에 대해 질타한 것도 이 같은 답답함 때문으로 여겨진다. "노사문제나 기업규제 등 투자의 장애물들을 제거해 기업이 맘껏 활동할 수 있는 공간만 만들어주면 투자 좀 그만하라고 정부가 말려도 사업을 벌이는 것이 기업이다"라는 박 회장의 발언을 명심해야 한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현 경제상황의 심각성을 정부당국자들도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그동안 예고된 위기는 현실화되지 않았다. 위기라는 것을 깨달으면 이에 미리 대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아무런 일을 하지 않아도 위기상황이 저절로 해소되는 법은 없다. 장기불황 조짐은 시간이 흐른다고 없어지지 않는다. 정치권과 정부가 가장 우선순위를 두어야 할 일은 기업이 활기차게 움직여 일자리를 만들어낼 수 있는 여건을 만드는 것이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