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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계한 원로 영화배우 김진규씨]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7면

18일 타계한 영화배우 김진규씨는 묵직한 저음의 남성적인 목소리와 신사풍의 외모로 50, 60년대 한국영화 전성기에 톱스타로 군림했다.

63년 전국여성인기투표에서 박정희.김종필에 이어 3위로 뽑힌 일화는 당시 그의 인기가 어떠했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전성기엔 10편까지 겹치기 출연을 할 정도로 인기가 높아 80년대초 영화계를 떠날 때까지 그가 출연한 작품 수는 6백편에 이른다.

67년엔 '종자돈' 을 감독하기도 했다.

그러나 '성웅 이순신' (70년) 과 '난중일기' (79년) 의 제작에 손댔다가 흥행에 실패하는 바람에 재산을 거의 날려버리고 경제적으로 불운한 말년을 보냈다.

일제시대에 일본 오이타 (大分) 현의 농업전문학교를 중퇴하고 귀국한 뒤 삼촌인 작곡가 김형래씨의 권유로 조선연예주식회사 연구생으로 들어갔다.

21세때 '살구꽃' 이라는 연극에 출연하면서 처음 연기생활과 연을 맺었다.

47년엔 장동휘씨 등과 함께 가극단 '장미' 를 창설하기도 했다.

54년 여배우 노경희와 이예춘.허장강 등과 공연한 '피아골' 로 일약 스타가 된 고인은 이후 '하녀' (60년) ,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61년) , '오발탄' (61년) , '벙어리 삼룡이' (64년) , '망향' (66년) , '삼포가는 길' (75년) 등 한국영화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주요 작품에 주연으로 출연했다.

이들 영화에서 그는 고난을 꿋꿋이 견뎌내는 선량한 인물상을 연기해 한국 남성의 전형을 창조했다는 평을 받았다.

40년대 후반 영화계의 선배격인 이민자씨와 결혼했으나 6.25 직후 헤어졌고, 56년 '옥단춘' 을 찍으면서 신인배우로 출연했던 김보애씨를 만나 재혼했다.

그러나 '난중일기' 의 실패 후유증으로 이혼했다가 지난해 다시 합쳤다.

3남3녀중 한 아들을 병으로 잃어 현재 2남3녀가 있고, 둘째딸인 김진아씨는 아버지의 길을 이어 영화배우로 활동중이다.

고인은 83년 제주에 정착, 그동안 호텔을 경영하며 은거해왔다.

65년 '벙어리 삼룡이' 로 아태영화제 남우주연상을 받았고, 부일영화상.대종상.청룡영화상 등 국내에서 주는 남우주연상을 여러 차례 수상했다.

영화인협회 이사장을 역임했고 대한민국 보관 문화훈장을 받았다.

이영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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