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평]한국적 위기대응 모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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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많은 사람들이 21세기는 동아시아의 세기가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20세기 후반 일본을 선두로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네마리 용의 놀라운 경제성장이 태국.인도네시아.중국으로 확산되자 동아시아 발전모델이 이야기되기 시작했고, 동아시아의 경제적 성공 근저에는 유교와 같은 아시아적 가치가 있다고 주장하는 문화경제론적 설명도 나왔다.

서구는 근면성.근검절약.높은 교육열.권위에 대한 존중.공동체 의식을 특징으로 하는 아시아적 가치가 동아시아의 경제적 기적을 가져오는데 핵심적 역할을 수행했다고 칭송하면서도 국가가 국민 주력기업을 육성해 공동으로 해외시장을 개척해나가는 동아시아적 신중상 (新重商) 주의에 경계의 눈초리를 보내기 시작했다.

'일본을 배우자' '박정희 모델에서 해결책을 찾자' 는 움직임이 제3세계뿐 아니라 서구에서도 유행했다.

동아시아의 성장을 견제하지 못할 경우 미국의 패권이 위협받을 것이라는 '신황화 (黃禍) 론' 도 출현했다.

그런데 '동아시아의 세기' 는 시작되기도 전에 신기루처럼 사라질 운명에 처해 있다.

태국과 인도네시아의 금융위기가 동아시아 전역에 확산되면서 한국의 고도성장 경제를 추락시켰고 급기야는 일본의 경제를 뒤흔들고 있다.

이제 사람들은 동아시아의 경제위기를 동아시아 발전모델에 내재한 문제점에 기인한다는 설명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동아시아 발전모델은 하늘에서 지옥으로 추락하고 있는 중이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고도성장의 견인차로 칭송됐던 바로 그 아시아적 가치가 경제위기를 가져온 주범으로 성토되고 있다.

정부 정책담당자와 기업간의 거래비용을 줄여주었다는 '네트워크 자본주의' 가 정치인.관료.기업가간에 부패한 담합구조를 형성시키는 '정실 자본주의 (crony capitalism)' 로 매도되고 있다.

우리는 동아시아의 위기에 대한 두가지 상반된 동아시아인들의 진단과 대응을 발견한다.

하나는 말레이시아 마하티르 총리의 대응이다.

마하티르는 동아시아의 위기를 동아시아의 도전을 잠재우고 세계지배를 영속화하려는 서구자본의 음모에서 비롯된 것으로 돌리고 있다.

따라서 동아시아인들이 피땀흘려 거둔 결실을 송두리째 탈취해가려는 서구에 대항해 동아시아 발전모델과 아시아적 가치를 고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한국 김대중 (金大中) 대통령의 대응이다.

金대통령은 동아시아가 위기를 맞게 된 것은 경제발전을 위해 민주주의를 희생해야 한다는 왜곡된 '아시아적 가치' 에 원인이 있으며, 동아시아가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선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을 병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방미중 金대통령이 환대를 받은 것은 동아시아의 위기에 대한 대응으로 탈서구화가 아니라 서구화를 가속화하겠다는 그의 주장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경제위기 이후에도 권위주의를 고수해 온 인도네시아는 구조조정에 실패하고 정치적 대변동을 겪고 있으나 민주주의의 강화를 선택한 한국은 경제적 위기 아래서도 평화적인 정권교체를 실현했고, 상대적으로 순조로운 구조조정 과정을 밟아나가고 있다는 사실은 한국의 선택이 현명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변화된 세계에서 낡은 틀을 계속하려는 것은 역사적 시간을 지체시킬 뿐이다. 가부장적 권위주의, 관치 (官治) 금융, 국가와 재벌의 담합에 의해 성장을 도모해 온 동아시아의 성공담은 이제 옛 이야기가 됐다.

우리에게 '박정희 모델' 은 이미 역사적으로 무용지물화된 낡은 모델일 뿐이다.

우리는 오늘의 위기를 외부세력의 음모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우리의 정치.경제 모델에 내재하고 있는 결함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음모설에서 출발해 '아시아적 가치' 를 고수해야 한다는 주장은 마하티르나 싱가포르의 리콴유 (李光耀)가 권위주의적 통치를 합리화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다.

자유나 인권같은 인류가 추구해야 할 보편적 개념이 없는 '아시아적 가치' 는 진정한 아시아적 가치가 아니다.

아시아인들이 보편주의적 가치를 추구하지 않고 아시아인들만의 특수한 가치를 추구할 때 아시아는 21세기의 세계를 이끌어가는 주역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세계는 동아시아 위기에 대한 한국적 대응의 결과를 주목하고 있다.

한국이 동아시아의 산업화와 민주화를 선도했듯이 경제위기를 벗어나는데 있어서도 모델이 돼야 할 것이다.

동아시아의 위기에 대한 한국적 대응의 성공은 자유시장경제가 정치적 민주주의 없이도 가능할 것이라는 '권위주의적 자본주의자' 들의 환상을 깨는데 기여할 것이다.

임혁백 고려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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