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 1년, 어떻게 준비하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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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2001년 1월, 거스 히딩크가 한국 대표팀 감독으로 부임한 지 얼마 안 돼서다. 1998년 월드컵 챔피언 프랑스축구협회로부터 연락이 왔다. 2002 한·일 월드컵 개막 직전 평가전을 갖자는 거였다.

나는 대한축구협회 기술위원장으로서 “대회 시작하기 전부터 찬물을 끼얹을 수 있다”고 반대했다. 히딩크는 달랐다. “프랑스 같은 강팀은 개막전이 아니라 결승전을 목표로 컨디션을 조절한다. 충분히 해볼 만하다. 자신감을 얻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밀어붙였다. 그가 옳았다. 비록 2-3으로 패했지만 한국은 세계 정상의 팀과 대등한 경기를 펼쳐 사기가 높아지고 자신감을 얻었다.

히딩크는 월드컵이 열리기 1년 반 전부터 월드컵이 열리면 어떤 일이 생길 것이며, 그 사이 팀을 어떻게 만들어 나가야 할지를 아는 축구 기술자였다. 그는 계획된 로드맵에 따라 흔들리지 않고 걸어갔다.

2002년 1~2월 미국에서 열린 북중미 골드컵 때도 마찬가지다. 몇 차례 부진한 경기가 이어지자 국내 축구인과 여론이 벌떼처럼 들고 일어났다. 하지만 경기 전날 히딩크는 태연하게 웨이트 트레이닝을 시켰다. 원래 경기 전날 웨이트 트레이닝은 득보다 실이 많다. 하지만 히딩크의 시계는 골드컵이 아니라 6월 4일 열리는 폴란드와 첫 경기에 맞춰져 있었다. 월드컵 때 한국은 ‘파워 축구’라는 닉네임을 얻었다. 만일 월드컵 4강 대신 골드컵에서 우승했다면 누가 기억이나 할까.

과학적 데이터도 적극 활용했다. 히딩크는 폴란드전을 사흘 앞두고도 셔틀런 테스트(정해진 시간 내에 일정 구간을 오가는 체력 측정)를 했다. 1년 반 동안 주기적으로 실시한 테스트다. 누가 얼마나 체력이 강한지, 얼마나 향상 혹은 퇴보했는지 한눈에 드러났다. 이 데이터는 베스트 11을 선정할 때 중요한 기준이 됐다.

허정무 감독에게도 1년이라는 시간이 주어졌다. 본선 무대에서 활약할 23명의 선수를 추려나가며, 그 선수들의 능력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는 전술을 찾아나가야 한다.

지금까지는 월드컵 본선 진출을 위해 아시아와 경쟁했지만 앞으로는 유럽·남미 강호와 대결해야 한다. 강팀을 한국으로 불러들이는 것보다는 우리가 원정지로 가서 평가전을 하는 편이 낫다. 상대의 경기력이 정점인 상태에서 맞붙어야 우리의 현주소를 직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2001년 5월과 8월, 한국은 프랑스와 체코에 잇따라 0-5로 참패했지만, 입에 쓴 약이 한국 축구의 체질을 강화시켰다. 선수 선발 때는 K-리그에서의 활약도 중요하지만 국제 무대에서 통할 수 있는지도 깊이 고려해야 한다. 또 다양한 전술을 변화무쌍하게 구사할 수 있도록 멀티 플레이어를 요소요소에 포진시키는 것도 중요하다.

무엇보다 훈련 일수를 확보하는 것이 급선무다. 국제축구연맹(FIFA) 규정에는 월드컵 직전 3주 훈련을 하도록 돼 있다. 한국은 이 정도 훈련으로는 절대 성과를 낼 수 없다. 히딩크 역시 1년 반 동안 280일 넘게 훈련했기에 기적을 만들 수 있었다. 축구협회와 프로연맹이 머리를 맞대고 효율적인 훈련 일정을 도출해야 한다. 주변에서도 열심히 도와야 한다. 허정무 감독은 적어도 한 번은 위기에 빠질 것이다. 그때 기술위원들은 비판의 손가락을 감독과 코칭스태프가 아니라 자신에게 겨눠야 할 것이다.

이용수 세종대 교수 (2002년 월드컵 당시 대한 축 구협회 기술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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