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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의 세계] 그들 손끝이 스쳐가면, 숨 죽였던 그림이 숨을 쉰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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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환 기자  

지난달 14일 오전 10시 서울 한남동 ‘캐릭터 플랜’ 사무실. 구석에 놓인 소파에 앉아 만화책을 읽고 있는 직원이 눈에 띈다. 모니터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직원, 삼삼오오 둘러앉아 차를 마시고 있는 직원도 있다. 오전 10시면 한창 바쁠 시간인데 도무지 긴장감을 찾아볼 수 없는 사무실 분위기. 그때 한구석에서 뭔가를 열심히 쓰고 있는 사람이 눈에 띄었다. 조심스레 다가가 봤다. 귀여운 캐릭터로 가득한 종이에 만화를 그리느라 열심이다. 노는 건지 일하는 건지 알 수 없는 이들의 직업은 애니메이터.

양지혜(43·여) 사장은 “노는 것처럼 보이지만 자유롭게 일하고 있는 것”이라며 “자유로운 분위기라고 해서 애니메이터가 설렁설렁 일한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라고 말했다. 그는 “본격적으로 밤샘 작업에 들어가면 일주일 넘게 사무실에서 먹고 자면서 일한다”고 덧붙였다. 이런 노력의 결과로 2008년 캐릭터 플랜에서 만든 애니메이션 ‘빠삐에 친구’는 대한민국 애니메이션 대상을 탔다. 현재 프랑스의 채널5와 한국의 EBS에서 동시에 방송되고 있다. 캐릭터 플랜 소속 애니메이터 8명을 포함한 스태프 50여 명이 3년 넘게 꼬박 한 작품에만 매달린 결과다.

‘빠삐에 친구’를 만든 캐릭터 플랜의 애니메이터들. 앞줄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임상준·이영래·남경태·박순미씨. [강정현 기자]

애니메이터는 ‘마법사’

애니메이터는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사람이다. TV나 극장에서 볼 수 있는 애니메이션은 물론이고 광고·인터넷·게임에 활용되는 애니메이션까지 만든다. 캐릭터 플랜 제작팀 임상준(33) 애니메이터는 “애니메이트(animate)는 ‘숨을 불어넣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며 “정지되어 있는 그림을 동영상으로 만들어 낸다는 점에서 애니메이터는 마법사나 다름없다”고 말한다. 예전에는 직접 제작에 참여하는 사람만을 가리켰지만 최근에는 기획·제작·편집 등 전 과정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을 애니메이터라고 부른다.

애니메이션 제작은 영화 제작 과정과 비슷하다. 크게 기획·제작·편집으로 나눠진다. 기획 단계에서는 시장조사를 통해 아이템을 구상하고, 이를 토대로 텍스트로 이뤄진 시나리오를 작성한다. 시나리오를 짜고 나면 전체적인 설계도에 해당하는 스토리보드(콘티)를 만들게 된다. 스토리보드를 만드는 과정이 제작의 핵심이다. 제작 교본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간이 가장 오래 걸리는 작업이기도 하다. 제작을 마치고 나면 편집 과정에 들어간다. CG와 렌더링(흩어져 있는 신을 부드럽게 이어주는 것) 등 편집 작업을 거쳐 한 편의 애니메이션을 만들게 된다.

애니메이터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창의성이다. 문화 콘텐트를 만들어 내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소재, 참신한 이야기, 감각적인 비주얼을 만들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면 애니메이터로서 기본 자질을 갖춘 셈이다. 미술 감각도 빼놓을 수 없다. 기본적인 그림 실력과 안목이 없으면 좋은 애니메이션을 만들 수 없다. 애니메이션을 만들 때 번뜩이는 아이디어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팀워크가 우선이다. 분업을 하지 않고는 완성이 어려울 정도로 과정이 복잡하기 때문이다. 임 애니메이터는 “애니메이터는 각자 자신이 좋아하는 캐릭터의 색깔이 분명하다”며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자신의 개성을 희생해야 한다”고 말했다. 애니메이터가 각자의 생각만 고집한다면 캐릭터의 이미지는 누더기가 될 수 있다.

애니메이터 되려면

과거에는 유명한 감독이나 애니메이터 밑에서 도제 식으로 일을 배우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최근에는 전문적인 교육기관을 거쳐 애니메이터가 되는 경우가 많아졌다. 대학에서 애니메이션 관련 학과를 전공할 수도 있고, 사설 학원 등을 통해서도 애니메이션 제작 과정에 대한 이론과 실기를 배울 수 있다. 보통 주어진 주제에 대한 소묘, 만화 창작 등 실기시험을 거쳐 입학하게 된다. 관련 학과에 입학하면 ‘애니메이션 영화사’ ‘애니메이션 연출 이론’ ‘만화 기법’ 등 기초 이론을 배우게 된다. 디자인기초·색채실습·스토리 작법·영상편집·컴퓨터애니메이션 제작실습 등 실습교육도 받는다.

졸업 후에는 보통 애니메이션 제작사로 진출하는 경우가 많다. 최근에는 게임 제작회사에 취업하는 경우도 있다. 애니메이션 제작사에서는 수시로 채용공고를 내는데 주로 지원자의 경력이나 포트폴리오를 보고 채용한다. 관련 교육기관을 통해 추천 받는 경우도 있다. 관련 지식을 바탕으로 방송사·영화사·광고사·출판사 등 미디어 관련 업체나 문구사·캐릭터 개발 회사·미니어처 제작 회사 등으로 진출하기도 한다. 그러나 애니메이션 제작사들이 대부분 중소업체이고, 계약직으로 인력을 채용하는 경우가 많아 근무환경이나 보수가 열악한 곳이 많은 편이다. 따라서 일에 대한 확고한 가치관과 열정이 필요하다.

일반적으로 애니메이션 기획자나 감독이 되기 위해서는 제작팀에서 오랜 경험을 갖추고 경력을 쌓아야 한다. 특히 감독은 그림을 그리는 것은 물론이고 기획·연출·레이아웃·촬영 등 애니메이션 제작의 전 과정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자료 협조: 인크루트 www.incruit.com

선배 한마디 9년차 임상준씨
수만 장씩 그리려면 무엇보다 끈기 있어야

‘망치’와 ‘신 암행어사’ ‘빠삐에 친구’ 등의 애니메이션 작품을 만든 캐릭터 플랜 임상준 감독(애니메이터). 그는 “내 손을 거친 작품은 자식이나 다름없다”고 말한다. 9년째 애니메이터로 일하고 있는 그를 만났다.

-어떻게 애니메이터가 됐나.

“전남대 회화과를 2002년에 졸업했다. 대학 4학년 때부터 애니메이션 작업에 참여해 아르바이트로 일하면서 캐릭터의 선을 깨끗이 정리하는 작업을 도왔다. 졸업 후에는 존경하던 이현세 작가에게 배우기 위해 이 작가가 교수로 있는 세종대 멀티미디어·애니메이션학과 야간대학원에 입학했다. 야간대학원에 다니는 동안 애니메이션 회사에 입사했고, 그때부터 줄곧 애니메이터로 일해 왔다.”

-어떤 자질이 필요한가.

“끈기가 가장 필요하다. 만화영화를 만들어 보고 싶다는 꿈만 가지고 애니메이션 업계에 뛰어드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그만두는 경우가 종종 있다. 애니메이션을 만든다는 것은 만화책을 만들거나 일러스트하는 것과 차원이 다르다. 1초에 24프레임이 필요하기 때문에 한두 시간짜리 애니메이션을 만들기 위해 수만 장을 그려야 한다. 이 단순하고 지루한 작업을 견뎌낼 수 있어야 한다.”

-만화가와 차이점은.

“영상을 만든다는 점이 다르다. 애니메이션은 출판물과 영화의 중간점에 있다고 보면 된다. 만화는 화면 내에서 구도를 잡으면 된다. 그러나 애니메이션은 (카메라를 들지 않았다 뿐이지) 영화에 가깝게 화면을 구성해야 한다. 그래서 카메라 공부도 따로 한다.”

-장단점은.

“내가 그린 그림 한 장 한 장이 모여 움직임을 갖게 되고, 살아나는 것을 보면서 느끼는 기쁨이 크다. 그러나 육체적·정신적으로 피로한 직업이다. 시간에 쫓길 때는 밤샘 작업도 많이 한다. 아무리 좋아하는 그림이라도 수천, 수만 장씩 그리는 것은 쉽지 않다.”

-기억에 남는 작품은.

“‘망치’가 기억에 남는다. 2002년까지 아르바이트로 일하다가 테스트를 통과해 처음으로 만든 창작 애니메이션 작품이다. 고생도 많이 했다. 극장판 작품이라 TV용으로 만든 애니메이션보다 두세 배 많은 품을 들였다. 엔딩 크레디트에 내 이름이 올랐을 때가 가장 뿌듯했다.”

-직업의 전망은.

“기회가 많다고 본다. 처음 뛰어들었을 때는 일본 ‘아니메’가 독보적이었다. 세계적으로도 그랬다. 그러나 일본이 독주하던 시대가 지났다. 제작 기법이 다양해지면서 한국 사람의 손재주가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다. 픽사(Pixar)에서 두각을 드러내고 있는 한국인도 있다. 제작 여건도 예전에 비해 많이 나아졌다.”

-지망생에게 한마디.

“꿈은 꾸되, 허황된 꿈은 꾸지 마라.”

김기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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