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부의 존재 이유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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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호 34면

바르는 손 세정제를 쓰다가 따가워서 살펴보니 손가락 사이에 좁쌀같이 작고 투명한 포진(疱疹)이 생겨난 것이 보였다. 손가락 군데군데 포진과 함께 피부가 갈라지거나 벗겨져 있는 걸 보고, 잠시 짬을 내 사무실 근처 병원을 찾았다.

사무실이 있는 교대역에서 강남역으로 이어지는 대로에는 정말로 피부과가 많았다. 건물 하나 걸러 하나씩 피부과를 진료 과목으로 내건 병원 간판들이 보일 정도여서 피부과를 찾는 수고는 덜 수 있었다. 그런데 제일 먼저 눈에 띄어 들어간 병원에서는 피부과 진료는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분명히 나는 ‘진료 과목: 피부과’라고 적힌 간판을 보고 들어갔는데 말이다. 밖에 걸린 간판은 뭐냐고 물으니 접수대의 간호사는 그건 미용을 위한 피부 관리를 한다는 말이지, 피부 질환 치료를 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이 근처에 있는 피부과 붙은 곳은 다 그래요”라는 말에는 ‘요즘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그런 것도 모르냐’는 듯한 뉘앙스마저 풍긴다. 순식간에 필자는 세상 물정도 제대로 모르는 촌뜨기가 돼 버리고 말았다.

피부는 인체의 가장 바깥쪽을 덮고 있는 조직으로, 외부에서 가해지는 다양한 물리적·화학적 충격들로부터 내부 장기들을 보호하며, 각종 자극을 받아들이고 대사를 조절하는 기관이다. 특히 피부는 체내의 모든 기관을 외부로부터 보호하는 1차 보호장벽으로 물리적 충격뿐 아니라 열과 추위, 화학약품의 침해, 자외선의 침투와 미생물의 침입을 막는다. 피부에는 멜라닌 색소가 있어서 자외선으로 인한 세포 손상을 막아 주며, 상처 없는 건강한 피부는 그 어떤 미생물들도 뚫고 들어오지 못하는 단단한 장벽으로 기능한다.

이처럼 피부는 그 자체가 외부와 인식하는 통로인 동시에 내부를 지키는 방어벽이며, 따라서 매우 중요한 기관이다. 그렇기에 피부만을 따로 떼어 전문 진료 과목으로 묶었을 것이고, 아름다워지기 위해서만 관리를 받는 부위도 아닐 것이다. 나아가 의사들은 피부 질환에 있어 진료의 중요성을 매우 강조한다. 피부 질환은 겉으로 보기에는 모두 비슷한 것 같지만 그 원인은 매우 다양해, 함부로 치료하면 오히려 부작용이 생길 가능성이 많다는 것이다. 그런데 막상 피부과 의원을 찾아가면, 피부과를 진료 과목으로 내걸고서도 피부 미용 관리만 할 뿐 정작 피부 질환은 진료하지 않는 경우가 왕왕 있다.

물론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경제적 가치가 있는 대상이 아니라면 상대적으로 소홀하게 다뤄지는 것이 자연스럽다. 피부 질환의 경우 환자 수가 적어 수지타산이 맞지 않고, 그래서 소홀하게 다뤄질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피부과 진료 과목을 내걸고도 피부 질환을 치료하지 않는 현상을 그대로 인정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진료 수가가 너무 낮아 기피된다면, 그건 수가 자체를 인상해서 해결해야 할 문제이지 환자의 치료를 거부해 해결할 문제는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피부 질환을 진료하지 않는다면 적어도 진료 과목에서는 피부과라는 과목을 삭제하고 피부 미용만을 전문으로 한다고 내걸어야 할 것이다. 그래야 혹시라도 나처럼 병원까지 들어갔다가 도로 나오는 황당한 일은 겪지 않을 테니 말이다.

그날 난 두어 군데의 병원을 더 거쳐서야 의사를 만날 수 있었다. 병명은 한포진으로, 손에 있는 땀샘에 포진이 발생하는 질환이었다. 정확한 원인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다한증과 금속 알레르기가 심한 체질이 원인 중 하나로 작용한다고 알려주었다.

그래서 완전히 없애기는 힘들고 조절해 가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도 알았다. 진료를 받고 증상에 맞는 연고를 처방받아 나오면서 문득 뒤돌아보니 유난히 피부과의 문턱이 높아 보인다. 혹시 다른 병원의 진료 문턱마저 이렇게 높은 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드니 어쩐지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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