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업급여 창구 '상전' 담당직원 앞에 신청자 주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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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실업급여는 정부의 시혜인가, 실직 근로자의 당연한 권리인가.

올초 대기업에서 명예퇴직한 朴모 (44) 씨는 지난 3월 실업급여를 신청하기 위해 노동사무소를 찾았으나 "명예퇴직자는 수급자격이 없다" 는 답변을 듣고 발길을 돌렸다.

朴씨는 실업급여를 포기하고 창업을 준비하던 중 함께 명예퇴직한 동료가 실업급여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전해 듣고 노동사무소에 문의전화를 해보았지만 전화벨이 수십번 울려도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별 도리없이 지난 13일 노동사무소를 찾아가 항의하자 고용보험과 직원은 눈길조차 주지 않으면서 "직업안정과에 가서 구직등록을 하면 실업급여를 받을 수 있다" 는 한마디만 던질 뿐이었다.

朴씨는 담당 직원의 짜증에 죄인이라도 된 것 같은 느낌으로 실업급여 신청서를 작성해 접수시켰지만 치밀어오르는 울화를 좀처럼 삭일 수 없었다.

다니던 중소기업이 폐업해 실직자가 된 權모 (30.여) 씨도 지난달 노동사무소를 찾았지만 담당직원은 "회사측이 아직 폐업신고를 안했으니 폐업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 자료를 가져오라" 는 말과 함께 신청서 접수를 거부했다.

"회사가 없어졌는데 어디서 실직 증명서를 떼오느냐" 고 항의했지만 한마디 설명도 듣지 못하고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최근 실직자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전국 46개 지방노동관서에서는 실업급여 신청과 실업인정 문제를 둘러싸고 실직자와 담당 직원간의 승강이가 그칠 날이 없다.

증빙서류를 빠뜨린 경우는 말할 것도 없고 복잡한 각종 구비서류를 모두 갖춰도 담당 공무원들의 불친절과 고압적 태도에 실직자들이 무안당하기 일쑤. 지푸라기라도 잡겠다는 심정으로 찾아온 실직자들을 다시한번 울리고 있는 것이다.

4주째 실업급여를 받고 있는 홍정표 (39.서울중구신당동) 씨는 "재직중 고용보험료를 낸 사람이 실직후 실업급여를 받는 것은 당연한 권리 아니냐" 며 "공무원들이 범죄인 다루듯 구직 여부를 묻고 은전이라도 베풀듯이 실업 인정 도장을 찍어줄 때면 차라리 실업급여를 포기하고 싶은 느낌이 든다" 며 고개를 떨궜다.

지난달 구직등록한 李모 (31.여) 씨도 "표준직업분류표에 정보검색사란 직업이 없어 직원에게 문의했지만 귀찮다는 듯이 '그냥 기타로 적으라' 고 했다" 며 "기타로 분류되면 구직은 물건너 간 것 아니냐" 며 분통을 터뜨렸다.

이처럼 실업급여 창구의 불친절이 문제인 것은 공무원 특유의 고압적인 자세가 몸에 배어 있는데다 국제통화기금 (IMF) 사태 이후 일선 노동관서의 업무량이 평소보다 10배 이상 늘었기 때문. 지난해 하루평균 7백28건이던 실업인정 건수는 이달들어 12배인 1만5백여건, 실업급여 신청은 지난해 하루평균 1백71건에서 올해는 1천2백여건으로 10배 가량 폭증했으나 담당 직원은 거의 늘지 않았다.

이훈범 기자 〈cielble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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