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한파로 죽마고우도 빚보증 외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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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중견 건설회사에 다니는 宋모 (43.전북전주시덕진구) 씨는 친구들로부터 걸려오는 전화를 일부러 피하고 있다.

얼마전 둘도 없이 친한 중.고교 동창의 연락을 받고 나간 자리에서 "퇴직금으로 편의점을 하려는데 돈이 모자라서 그러니 5천만원의 은행 빚 보증을 서 달라" 는 부탁을 받았다.

1억원도 안되는 아파트가 전재산인 宋씨는 밤새 고민한 결과 가정을 지키기 위해 보증을 설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릴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곤경에 빠진 죽마고우의 청을 눈앞에서 거절할 수 없어 자신에게 걸려오는 전화를 여직원이나 직장동료에게 대신 받게 해 따돌리고 있는 형편이다.

宋씨는 "그 친구가 내 입장을 눈치채고 연락 안하기만 기다리고 있다" 며 "30년 우정이 풍비박산나는 기분" 이라며 씁쓸해 했다.

S은행 전주지점에 근무하는 金모 (29) 씨도 마찬가지. "실직자 친구들이 나를 '최적의 보증인' 으로 점찍어 줄줄이 빚 보증을 요청해오고 있다" 며 "당분간 친구들과 만나지 않기 위해 동창회나 경조사 자리에도 안나갈 생각" 이라고 말했다.

최근 경제한파로 '수십년 우정' 이 금가고 다정했던 친.인척이 '딴 사람' 처럼 갈라서고 있다.

자고 나면 책상이 없어지고 회사가 무너지는 판에 아무리 가까운 친구라도 수천만원의 빚 보증을 서줄 수 없어 '도망' 다니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친척이나 퇴직 사우의 보험가입.승용차구입 등의 부탁을 들어줄 수 없어 고민하는 직장인 또한 적지 않다.

퇴직 사우로부터 술자리에서 보험가입 요청을 받은 李모 (43.회사원.서울은평구불광동) 씨는 임기웅변으로 겨우 '위기' 를 모면했다고 한다.

보험가입 얘기를 꺼내는 순간 소주를 벌꺽 들이키며 "나도 이번에 잘릴 것 같다" 고 엄살을 부려 거절했다.

최근 처가집 식구들과 '남남이 된' 金모 (38.회사원.서울서대문구홍제동) 씨도 같은 경우. "승용차를 팔아야 그만큼 월급을 받을 수 있다.

한대만 팔아달라" 는 자동차 협력업체 간부인 막내 처남의 요청을 단호하게 거절했기 때문. 金씨는 "장모까지 전화로 항의해와 당분간 처가집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할 것 같다" 고 걱정했다.

이에 대해 전문가들은 비록 경제적으로 도와주지는 못하더라도 인간관계만은 끊어지지 않도록 따뜻한 마음으로 주위 사람을 대하라고 충고한다.

전북대 김영정 (金永珽.사회학과) 교수는 "계속되는 경제난이 인간관계의 파탄으로 이어지고 있다" 며 "인생을 길게 보고 서로 입장을 바꿔놓고 이해해야 돈독한 인간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 것" 이라고 말했다.

전주 = 서형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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