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종교화합의 시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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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16세기 전반의 종교개혁으로 유럽에서 세력을 잃은 가톨릭교회는 해외선교를 통해 실지회복에 나섰다.

아프리카와 인도를 거쳐 동남아시아에 이른 선교사들은 동아시아 문명권의 문턱에서 경이와 흥분을 느꼈다.

유럽 전체보다 더 큰 인구를 가진 중국과 일본이 그들의 앞에 놓여 있었다.

게다가 이 거대한 문명은 여러 면에서 유럽보다 더 세련된 면모를 보여주고 있었다.

많은 선교사들은 이곳이 기독교 선교사업의 궁극적인 목적지라고 느꼈다.

일본에서는 1540년대부터 쉽게 선교활동이 시작됐다.

그러나 해금 (海禁) 정책을 펴고 있던 명 (明) 나라는 선교사의 진입을 완고하게 가로막았다.

1583년에야 중국내 활동을 시작한 첫 선교사는 이탈리아인 마테오 리치였다.

그는 죽을 때까지 27년간 중국을 떠나지 않으며 선교사업을 탄탄한 궤도 위에 올려놓았을뿐 아니라 서양의 제반 학문을 중국에 소개해 동서교섭사에 큰 자취를 남겼다.

마테오 리치는 중국에 들어갈 때 승복 (僧服) 을 입고 있었다.

그 전에 선교가 시작된 일본에서 승려들이 존중받는 것을 보고 선교사들이 종교인의 신분을 나타내는 뜻에서 승복을 입던 관행을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막상 중국에서는 승려들이 별로 존중받지 못하는 것을 보고 몇년 후부터는 유삼 (儒衫) 으로 바꿔 입었다.

사대부가 존중받는 중국에서는 종교인보다 지식인으로 행세하는 편이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복장의 선택은 선교노선의 반영이었다.

기독교의 임무는 유교를 적대하는 것이 아니라 유교의 발전을 도와주는 것이며 불교의 그릇된 가르침을 배척하는 것이라고 한 리치의 선교노선을 보유역불론 (補儒易佛論) 이라 한다.

상급자들에게 보낸 리치의 보고서에는 불상을 파괴하는 등 불교에 대한 개종자들의 행패가 자랑스럽게 적혀 있다.

동서문명 융화에 기념비적 업적을 세운 리치의 '천주실의 (天主實義)' 에조차 무분별한 불교비판이 가득한 것을 보면 종교간의 화합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절감하게 된다.

'문명의 충돌' 이 무엇보다 종교적 갈등에서 비롯된다는 새뮤얼 헌팅턴의 관점에도 수긍하지 않을 수 없다.

어제 석탄일을 맞아 우리 사회의 여러 종교가 대립보다 화합을 지향하는 모습을 보여준 것은 어려운 시절을 함께 이겨내려는 뜻까지 겹쳐진 것 같아 더더욱 흐뭇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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