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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훈 30주기]다시 주목받는 시세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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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지훈은 가버렸다./그후 2.3일. /어제는 날이 흐리고/오늘은 비가 온다. /이미/그가 젖을 수 없는 비…. /…오늘은/우리의 옷깃만 젖어서 무겁다." 박목월.박두진과 함께 '청록파' 로 불리며 우리 고유의 아름다움을 현대시로 옮기기 위해 애썼던 조지훈 (趙芝薰.1920~68) .목월은 지훈을 잃은 슬픔을 위 시 '2.3일' 로 읊었지만 그 역시 곧 세상을 버렸다.

박두진씨가 홀로 남아 있지만 그들이 추구했던 시 세계는 뚜렷한 후계자도 없이 교과서 속에만 남아있을지도 모른다. 다음 달 17일은 지훈의 30주기가 되는 날. 후학들은 48세라는 이른 나이에 '과거' 가 되고 만 그의 시 정신을 오늘에 되살리기 위한 작업에 나섰다. 조병화. 김춘수. 김남조. 홍윤숙. 김광림. 성찬경. 허영자. 이탄 등 한국시인협회 (회장 정진규) 시인 2백여 명은 5월10일 경기도 마석에 있는 묘소를 방문, 참배하는 대규모 행사를 개최한다.

지훈의 시를 낭송하고 그의 삶과 시에 대한 발표회도 갖는다.

이에 앞서 '현대시학' 5월호에는 추모 특집으로 대표작들이 재수록되고 '우리 시의 본질과 서정성 회복' 을 주제로 지훈의 시를 분석한 김종길 고려대 명예교수의 글 등이 실린다.

지훈 시의 특징은 불교적 요소나 순수 자연을 바탕으로 하는 동양적.전통적 서정을 모국어의 아름다움을 살려 옮겨 놓은 데에 있다.

김소월이나 정지용처럼 우리말의 형태성.음악성 등에 충실한 민족시의 전통을 계승한 것. 바로 '고풍의상 (古風衣裳)' 과 같은 아름다움이다.

"하늘로 날을 듯이 길게 뽑은 부연 끝 풍경이 운다.

/처마끝 곱게 늘이운 주렴에 반월 (半月) 이 숨어/아른아름 봄밤이 두견이 소리처럼 깊어가는 밤/곱아라 고아라 진정 아름다운지고…" 이런 민족시의 전통이 왜 절맥 (切脈) 되다시피 했을까. 정진규씨는 "우리 시단은 60년대 이후 서구시 이론을 받아들이는데 급급하거나 이데올로기 문제에 휘말려 전통 서정에 대한 논의는 상대적으로 취약했다" 고 말한다.

요즘 시라고 서정성이 없지야 않겠지만 우리 언어의 특성을 찾는데 소홀했다는 지적이다. 이런 일을 내다보기라도 한 듯 지훈은 오늘의 시인들이 곱씹어 봐야 할 말을 남겼다.

"민족시에 대해 사상이 없고 정치가 없고 현실 내지 시대가 없다고 보는 이들은 시란 주로 정치적 사회적 사상을 뼈다귀로 하고 거기에 약간 미사 (美辭) 의 옷을 입히는 것쯤인 줄 안다.시의 영역은 어디에든 갈 수 있는 무제한이나 다만 시가 되고 예술이 되는 것을 전제로 하는 무제한이다."

학자로 민족주의 교육자로 혹은 정치평론가로 누구보다 현실 사회에 활발히 참여했던 그였기에 그의 시는 예술로서 더욱 엄격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지훈의 그 예술적 엄격함이 퇴색하지 않는 푸르름으로 남기 바라는 마음에서 이봄 후학들이 모여드는 것이다.

양지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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