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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푸라기에 인생 건 여인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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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호 11면

그녀, 1950년대에 서울대 철학과를 다닌 엘리트였다. 평생 지푸라기에 인생을 걸 줄은 상상도 못하던 도시 여성이었다. 사랑에 빠진 게 죄라면 죄일까. 인병선(74) 짚풀생활사박물관장은 태어나 두 번 사랑에 빠졌다. 그 첫 번째 사랑은 ‘껍데기는 가라’의 신동엽(1930~69) 시인이었다. 학업도 포기하고 그의 아내가 된 것이 57년. 변변한 직업도 없던 빈농의 아들과 세 아이를 낳고 사는 건 차라리 쉬웠다. 남편을 떠나 보내는 일보다. 두 번 다시 남자에 인생 걸지 않겠노라 다짐했다. 생계를 해결하는 데 몰두한 지 10년. 짚풀을 향한 두 번째 사랑은 그즈음 시작됐다.

이경희 기자의 수집가 이야기 - 인병선 짚풀생활사박물관장

1 씨오쟁이-다음 해 농사에 사용할 씨앗을 담아두던 그릇. “굶어죽어도 씨오쟁이는 베고 죽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농민들에겐 귀중한 것이었다.2 동고리-버들가지로 엮은 함. 시집갈 때 떡도 담고, 반짇고리 대용으로도 쓰고,다용도 바구니도 되었던 서민들의 생활용품.3 짚독-겹으로 만든 짚독은 웬만한 솜씨가 아니고선 만들기 어려운 작품이다. 쌀을 담아 가신으로 모셨다.

“우리 문화를 알아야 한다는 생각에 민학회 회원으로 가입해 고택·사찰 답사를 다녔어요. 그러나 그런 것들이 지배자의 문화란 인식 때문인지 전혀 관심이 안 가더군요.”

그의 마음을 끌어당긴 건 절 밑 가난한 동네였다. 짚가리가 젖지 않도록 씌워둔 주저리에 카메라 렌즈를 대고 초점을 맞추는데 뭔가 찌르르했다. ‘이거야말로 예술 아닌가!’ 남편과 사랑에 빠지던 그 순간과 비슷했다. ‘잘 살아 보세’란 구호 아래 초가지붕을 비롯한 옛 농촌 풍경이 마구잡이로 쓸려나가던 시절이었다.

“아무도 모르는 금맥을 하나 잡았다는 생각이 들었죠. 시인은 나 말고도 많지만, 짚풀 문화에 관심 가진 사람은 세상에 나 하나뿐이었으니까요.”
짚신 삼는 법을 아는 이의 수는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카메라와 녹음기를 들고 산골짝을 찾아 헤맸다. 방방곡곡에서 건져낸 짚풀의 쓰임새는 무궁무진했다. 집을 짓고, 신을 삼고, 바구니와 그릇을 짜고, 빗자루를 맸다. 짚으로 짠 멍석은 잔치ㆍ제사·장례 어디에나 활용됐다. 그들이 가진 것이 짚풀뿐이기도 했지만, 볏짚의 특성 때문이기도 했다.

“속이 비어 쉽게 부서지는 밀짚으론 새끼를 꼬지 못해요. 그래서 모자ㆍ핸드백이 전부죠. 그러나 볏짚은 탄력이 있어 농기구를 비롯해 온갖 생활용구를 만들 수 있어요.”

짚풀은 토속신앙과도 맞닿아 있었다. 옛 농촌에선 볏가리를 세우고 당산나무에 짚 밧줄을 감아 벽사와 풍년을 기원했다. 새끼를 꼬아 만든 금줄, 짚으로 만든 가신(家神ㆍ집 안을 지키는 신)은 뿌리 깊은 신앙의 상징이었다. 짚풀을 연구하다 보니 기층 문화의 질곡도 끝없이 엮여 나왔다. 사람 값보다 소 빌리는 값이 높았던 터라 소의 발에 짚신을 신겨가며 곱게 모셨다. 일제시대에는 쌀을 일본으로 수탈해가기 위해 집집마다 가마니를 100장씩 짜도록 할당한 아픈 역사도 있었다.

“짚풀로 엮은 물품들 하나하나에 애절한 사연이 있지요.”
속으로 엉엉 울어가며 예서 제서 모은 게 8000점이 넘는다. 그러나 수집보다 염두에 둔 건 기록이었다. 100년 뒤에도 보고 따라할 수 있도록 동영상 자료를 손수 만들었다. 박물관에서 짚풀공예 강사도 양성한다. 지금까지 배출한 인력만 100명에 달한다. 그는 박물관의 ‘교육’ 기능을 강조했다.

“인구의 70~80%가 농사짓던 시절엔 쌀을 털고 남은 볏짚, 들판에 널린 깔따리ㆍ싸리ㆍ버들가지ㆍ댕댕이덩굴ㆍ겨릅대ㆍ인동덩굴ㆍ왕골ㆍ갈대 등이 민예품으로 태어났어요.”

썩지 않는 플라스틱 따위로 자연을 해칠 일도 없었다. 짚풀을 연구하다 보니 “편리함에 취해 지구를 망치는 현대의 삶이 과연 과거보다 가치 있는 것인가” 반문하게 됐다.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한 교육프로그램을 수시로 운영하는 것도 조상들의 삶에 담긴 가치를 전하기 위해서다.

그는 지난해 박물관을 재단으로 만들었다. 개인재산이던 수집품 전부와 서울 대학로 혜화로터리에 있는 감정가 40억원짜리 박물관 건물 두 동까지 모조리 공공의 재산으로 내놨다. 그가 죽고 나서도 박물관이 이어지도록 손을 쓴 셈이다.

“뭐든 운명이 되면 빠져나오지 못하지요. 지푸라기라도 잡지 않았으면 40년을 어떻게 버텼겠어요? 신동엽 시인을 만난 건 후회하지만, 볏짚 만난 건 그래도 후회 안 합니다.”


중앙일보 10년차 기자다. 그중 5년은 문화부에서 가요·방송·문학 등을 맡아 종횡무진 달렸다. 사람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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