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에서] 폭행 사건 자작극 쉽게 통했던 이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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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프랑스 혁명 기념일이 '유대인으로 오인받아 아기와 함께 폭행당했다'고 꾸며낸 한 여인의 거짓말로 얼룩졌다. 14일 르몽드와 르피가로 등 유력 일간지들이 모두'거짓말 기사'로 1면 머리를 장식한 데 이어 자크 시라크 대통령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거짓말 사건에 대해 "유감"을 표명했다. 너무나도 허술한 시나리오에 프랑스 전체가 48시간 동안 감쪽같이 속아 넘어갔기 때문이다.

23세 주부 마리는'지난 9일 오전 파리 교외 고속전철(RER) 안에서 아랍인으로 보이는 청소년 6명으로부터 옷과 머리칼을 뜯기고 배에 나치 독일의 상징을 그리는 가혹 행위를 당했다'고 경찰에 신고했다. 문제는 현장이 기차 안이라는 점이다. 사건이 벌어진 10여분 동안 경찰에 전화신고를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신고를 받은 기관사가 기차 문을 잠근다면 범인들은 도망칠 수도 없었다.

사건 발생 하루 뒤인 10일 저녁 AFP통신이 1보를 타전했다. 9시54분 도미니크 드빌팽 내무장관의 비난성명이 발표된다. 10시11분에는 시라크 대통령이 철저한 수사를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한다. 다음날 시내에서 규탄시위까지 벌어졌다.

의혹은 경찰이 제기했다. 폐쇄 회로 TV 테이프에서 용의자들을 찾을 수 없는 데다 증인도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경찰의 추궁에 마리는 13일 자신이 이야기를 지어냈다고 자백했다.

그녀의 얘기는 공분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연약한 여인에게 건장한 청년들이 백주에 집단폭력을 가했다는 점, 어린 아이까지 내팽개쳐지는 상황에서 주위의 아무도 말리지 않았다는 점이 그렇다. 인종차별주의까지 들어 있다. 이에 정치권과 언론에서는 확인도 안 된 사건을 앞장서 퍼뜨렸다.

프랑스 내 무슬림들은 자기들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반감 때문에 이렇게 쉽게 이야기가 확산됐다고 주장한다. 론 알프 주(州) 이슬람평의회 의장인 카멜 캅탄은 "프랑스에서 반유대인주의가 논의될 때마다 무슬림들을 겨냥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박경덕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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