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암 이하복선생 자서전 화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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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스승' 이 없는 시대. 학교에서도, 직장에서도, 사회 어디를 보아도 믿고 따르며 우러르고 싶은 '스승' 을 찾기란 결코 쉽지 않다.

영리에만 급급해 나날이 이악스러워져만 가는 이 시대에 자신이 가진 사회적 명리를 훌훌 털어버리고 후학 양성에 일로매진한 참스승의 자서전이 알음알음으로 알려져 작지만 긴 여운을 만들어가고 있다.

청암 (靑菴) 李夏馥선생 (1911~1987) 의 자전 논고집 '왔다 사랑했다 그리고 갔다' 가 출간된 것은 지난해 11월. 고인의 10주기를 맞아 평생을 두고 틈틈이 써놓은 유고들을 모아 李大遠 (삼성자동차부회장) 씨 등 네 아들이 정리해 6백60쪽 분량의 책으로 엮어냈다.

비매품인 이 책이 화제를 모으고 있는 이유는 그 속에서 느낄 수 있는 한 선비정신의 울림 때문이다. 청암선생은 당시 쌀 2천섬을 수확할 수 있는 토지와 지방 민속문화재로 지정될 정도의 큰 집을 물려받았고 자신도 경성제일고보.일본 와세다대 경제학과를 거쳐 보성전문 교수라는, 당시로서는 출세의 지름길을 달릴 수 있는 조건들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같은 조건들을 미련없이 던져버리고 가정형편이 어려워 중학 진학을 포기한 아이들을 위해 고향인 충남서천군기산면에 동강 (東崗) 학원 (동강중) 을 설립, 동생에게 교장 자리를 맡긴 뒤 자신은 아무 직함 없이 도덕과 한문을 가르치며 오로지 인재양성의 외길만을 걸어왔다.

둘째아들 大遠씨는 "학창시절 월사금을 제때 못낼 정도로 어려운 살림을 해야 했고 자유당 시절 여러차례 정부의 부름에 묵묵부답하던 아버지가 원망스럽기만 했다.

그러나 세상 물정을 알게 되면서 인생을 그렇게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또 얼마나 용기를 필요로 하는 것인지 새삼 느끼게 됐다" 고 털어놓을 정도로 선생이 걸어온 길은 완고하고도 고독했다.

게다가 이 책에는 1910년대 이후 청암의 고향인 한산과 서천지방의 세시풍속, 개화기의 모습, 서당의 공부장면, 한산모시 만드는 방법 등 한국 근대사의 단면이 꼼꼼한 메모를 근거로 활동사진처럼 기술돼 문화역사자료적 측면에서도 쏠쏠한 읽는 재미를 준다. 학교법인 동강학원 (0459 - 951 - 1007) .

정형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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