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빈 칼럼]역사문맹이 늘고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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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옛 사람이 말하기를 '國可滅 史不可滅' 이라 하니 무릇 나라 (國) 는 형체요, 역사 (史) 는 정신이다." 일제침략으로 나라를 잃고 중국 상하이로 망명한 역사학자 백암 (白巖) 박은식 (朴殷植) 이 피를 토하듯 쓴 역작 '한국통사 (韓國痛史)' 머리글에 나오는 명문이다. 지난해 서울대 특차모집에서 국사학과를 지망한 19명의 응시생들에게 이 문장을 읽고 뜻을 말하라고 했다.

대부분 학생이 '滅 (멸)' 자를 읽지 못했다.글자를 모르니 뜻을 알 리가 없다. 서울대 특차 응시자라면 전국의 수재라 할 만하다.

게다가 한국사 전공을 선택한 학생이라면 이 정도는 이해해야 한다는 게 출제교수의 기대였다.기대는 무참히 깨졌다.

'나라는 망할 수 있어도 역사는 결코 망하지 않는다' 는 역사의식이 전혀 없는 역사문맹교육이 현재 진행중이다. 한자 하나 모른다고 역사문맹으로 확대 해석할 수 있느냐 하겠지만 학교현장의 역사교육은 '국사 없애기' 로 일관하고 있다.

현행 중학교에선 국사가 사회과로 통합돼 있으면서 교과서만 독립돼 있다. 독립교과목이 아니니 성적표에도 국사점수가 없다.

주 2시간에 2년간 건성으로 배울 뿐이다. 고교에선 명색 필수지만 수업시간은 주당 2시간, 수능시험에 국사문제가 별로 나오지 않으니 천덕꾸러기로 전락했다.

그나마 지난 문민정부때 7차 교육과정개정안을 만들면서 '공통사회' 라는 과목을 신설해 지리.정치.경제.세계사, 그리고 국사를 뒤섞어 함께 가르치게 했다. 2000년부터 아예 국사과목이 없어질 운명에 처했다.

역사학회의 항의와 반발도 있었다. 그러나 세계화시대에 웬 국수주의적 과목이기주의냐고 일축해버렸다. 지난해부터는 사법고시 필수과목이었던 한국사 시험을 폐지했다.

공직자의 국가관 확립이라는 필요성이 어째서 갑자기 용도 폐기된 것인지 아무런 설명이 없다. 지금은 어느 대학에서도 국사를 교양과목으로 가르치지 않는다.

권위주의 시절 한국사연구는 운동권 학생들의 전유물이었다. 한국사 연구가 지하화하면서 반체제 이데올로기의 도구라는 이유로 국사는 설 자리를 잃었고 또 한편으로는 군사정권의 친체제 도구과목이라 해서 국민윤리.교련과 함께 대학교양과목에서 사라졌다.

그 결과 전국 4년제대학 국사담당 교수인력은 모두 합쳐야 2백80명 정도다. 중국문학 3백85명, 철학 4백33명, 독일문학 3백53명에도 훨씬 못 미친다.

서울대에 규장각도서관이 있다. 국보적 역사자료가 산적해 있다. 이 규장각에 단 한명의 국사전공 교수도 없다.

일본 도쿄 (東京) 대 사료편찬소에는 70여명의 일본사 교수가 소속돼 있다. 지금 서울대에는 현대사를 배우겠다는 학생들이 모여들고 있지만 지도할 전공교수는 단 한명뿐이다.

역사교육 부재에 역사문맹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지난해 가을 주한 일본대사관 직원이 한명희 (韓明熙) 국립국악원장에게 전화를 했다.

새로 부임할 오구라 가즈오 (小倉和夫) 대사가 국악과 판소리 연구에 관심이 많으니 이를 가르칠 선생님을 추천해달라는 부탁이었다. 부임 이튿날 오구라 대사는 오늘저녁부터 가르침을 받겠다는 전갈을 해 왔다.

나는 이 이야기를 전해 들으면서 한 외교관의 투철한 직업적 자세에 감복하고 나 자신 국악에 대해 무얼 알고 있는가 하는 자괴 (自愧) 와 깊은 반성을 했다.국악이나 국사는 민족의 혼과 정신을 담고 있는 똑같은 국학이다.

국사가 경시됐다면 국악은 천시 대상이었다.국악인들의 피나는 해외활동으로 외국에서 국악이 각광받으면서 제 나라 음악이 역수입된 꼴이다.

운동권 학생들의 동아리 모임이 없었다면 국악 대중화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제서야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전통음악원이 개설되고 문화관광부가 국악FM방송국을 추진하겠다고 한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체계적인 국악교육의 활성화를 기대한다. 나를 제대로 알기 위해 우리의 역사를 배우고 나라의 소리를 듣는다. 세계화도 중요하고 서구적 가치관도 배워야 한다.

그만큼 우리 역사와 음악을 배워야 제대로 된 세계화가 될 수 있다. 음악교과서에서 국악의 기본마저 가르치지 않고, 제 나라 역사를 '공통사회' 라는 과목으로 가르치는 세계화교육이라면 나라와 정신을 함께 잃는 국사공멸 (國史共滅) 의 화를 면할 길 없다.

권영빈<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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