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 영국식 전쟁 책임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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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14일 영국 국회의사당은 종일 부산했다.

이라크 참전의 명분이 된 대량살상무기(WMD) 관련 정보의 신뢰성을 조사해 온 특별위원회가 6개월간 준비해 온 보고서를 발표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낮 12시30분 보고서 발표에 이어 오후 1시30분엔 토니 블레어 총리가 다시 본회의장에 나와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이어 상원에서 보고서를 두고 토론이 이어졌다.

토니 블레어 총리의 표정은 밝았다. 그는 보고서 공개 24시간 전에 초안을 넘겨받아 검토를 끝냈다. "특정인 누구도 비난할 일은 못 된다"는 보고서의 결론을 알고 있었다.

특별위원회 버틀러 위원장은 예정대로 정보 오류를 지적하면서 "그 같은 실수는 여러 사람의 공조 작업(collective operation) 과정에서 일어난 것이기에 특정인의 책임을 물을 수 없다"고 발표했다. "이라크가 45분 만에 WMD 공격을 감행할 수 있다"는 엉터리 보고서를 만든 정보 책임자에 대한 면책을 분명히 한 것이다.

블레어 총리는 "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선의(善意)에 의해 빚어진 실책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책임을 지겠다"고 당당하게 나왔다. "이라크 WMD에 대한 정보가 잘못됐음은 인정한다"면서도 "그러나 어느 누구도 거짓말을 한 적은 없으며, 정보를 왜곡하지도 않았다"고 힘주어 말했다. '내가 책임진다'는 말은 곧 '아무도 문책하지 않겠다'는 선언이나 마찬가지다.

결과적으로 지난 9일 미국의 상원 정보위원회가 정보의 오류를 인정하면서도 "집단 사고(group think)의 결과"라며 문책을 피해간 방식과 같았다. '집단 사고'란 응집력 강한 집단이 공통된 의견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이에 맞지 않는 대안을 무시하는 경향을 말하는 심리학 용어다. '공조 작업' 역시 집단 속에서 이견이 간과될 수 있음을 시사하는 표현이다. 현장을 취재하던 아랍어 신문 알하야트의 특파원 유섭 카젬이 "그러면 그 과정에서 죽어간 숱한 이라크인들은 뭐냐"고 물었다. 강대국의 추상적인 레토릭(수사학)으로는 설명하기 힘든 반문이었다.

오병상 런던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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