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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봤습니다] 최은혜 기자의 ‘영어 올림픽’ 스펠링비 미국 본선 현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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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가족이 함께 참여하는 대회

스펠링비 본선 대회가 시작되던 지난달 26일(현지시간) 워싱턴 그랜드 하얏트 호텔. 참가자들이 머무는 숙소이자 대회장이다. 각지에서 모인 학생과 그 가족들로 북적댔다. 아이들은 삼삼오오 모여 웃고 떠들기도 하고 노트를 들여다보며 공부에 열중하기도 했다.

이날은 첫 번째 라운드인 지필고사를 치르는 날이었다. 고사장을 찾아 컴퓨터로 문제를 푸는 방식이다. 조용하고 긴장된 분위기의 대기실에서 차례를 기다리는 학생들 가운데 서지원(13·고양 한내초6)양이 눈에 띄었다. 서양은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한국 대표로 선발돼 본선에 참가했다. 서양의 어머니 정은성(40·고양시 일산구)씨는 “모르는 문제도 충분히 고민하고 나오라고 했다”고 말했다.

“Speller 171!” 감독관이 번호를 불렀다. 그러자 뒤쪽에 앉아 있던 학생이 번쩍 일어섰다. 금발의 부모가 고사장으로 향하는 아이의 어깨를 다독이며 격려했다. 대회에는 참가 학생뿐 아니라 부모·형제·친척 등 온 가족이 동참하고 있었다.

참가자들은 경쟁 상대가 아닌 ‘친구’

고사장 밖에서는 파란색 리본이 달린 명찰을 가슴에 붙인 아이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명찰을 보고 스펠링비 참가자라는 것을 알아보고는 서로 무언가를 주고받는다. 모든 참가자의 사진과 그에 대한 정보가 담긴 수첩이다. 대회 주최 측에서 제작해 배포한 이 수첩을 가지고 다니며 아이들은 사인을 해주기도 하고 받기도 한다. 레이철 맥펄은 “남동생이 대회에 참여하게 돼 같이 왔는데 참가자들 사인 모으는 것이 무척 재미있다”며 웃었다.

대회장 한편에서는 커다란 게시판도 눈에 띄었다. 대회 기간 함께 공부할 사람을 찾거나 마지막 날 열릴 송별파티의 티켓을 구한다는 등의 메모가 붙어 있었다. 호텔 곳곳에서는 참가 학생과 가족들이 서로에게 “Good luck(행운을 빌어요)” “Thanks(고마워요)”라는 인사를 건네는 것을 쉽게 볼 수 있었다.

대회 참가 자체가 집안의 명예

다음 날은 2,3라운드가 이어졌다. 참가자들이 한 사람씩 무대 앞에 나와 자신에게 출제된 단어의 철자를 구두로 맞히는 방식이다. 1~3라운드의 성적을 모두 더해 준결승 진출자를 가리게 된다. 대회장으로 가는 길의 입구에서는 보안을 위해 짐 검사까지 하며 출입을 통제했다.

취재 열기도 대단했다. 지역 신문의 기자, 방송사 취재진, 통신사 기자 등으로 대회장 입구는 북적거렸다. 미국의 소리(Voice of America) 방송국 쇼널리 센 프로듀서는 “스펠링비는 많은 사람이 시청하면서 철자를 맞힐 때마다 환호성을 올리는 인기 프로그램”이라며 “액션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스포츠와 같이 흥미진진하다는 점 때문에 사람들이 즐겨 본다”고 말했다.

서명완(12·Oakdale Elementary School)군의 어머니 정월자(55·Normal, Illinois)씨는 “이곳에 이민 온 지 3년 만에 아이가 스펠링비 본선에 진출했다는 소식이 지역 신문에 열흘 동안이나 보도됐다”고 기뻐하며 “아이가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고 하더라”고 덧붙였다.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결승전

본격적인 라운드가 시작됐다. “discreet.” 출제자가 문제 단어를 발음하자 151번 참가자 브렌트 헨더슨은 “Language of origin, please?”라며 출제자에게 어원을 되묻는다. 참가자들은 출제된 단어의 품사·정의·어원·예문 등을 질문할 수 있다. 브렌트는 긴장한 듯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d-i-s-c-r-e-e-t.” 정답이었다. “Yes!”

이 대회의 심판(Judge) 중 한 명이자 덴버 메트로폴리탄 주립대학(Metropolitan State College of Denver)의 영어학 명예교수인 에드 로는 “단어의 발음을 듣고 입으로 말하고 그 뜻과 어원, 예문을 공부해야 하는 대회 방식 자체가 미국 학교들에서 학생들에게 어휘를 가르치는 방법”이라며 “단순히 철자의 순서를 암기하는 것이 아니다”고 설명했다.

대회장 주변에선 ‘철자법을 제대로 하라(spell sensibly)’는 팻말을 붙인 대회 반대자도 있었다.

대망의 결승전이 열린 28일. 결승·준결승전은 틀리면 바로 탈락한다. 네투 찬다크(여)가 조심스럽게 답을 말했지만 “땡” 하는 종소리가 들렸다. 객석에서는 “오!” 하는 탄식이 흘러나왔다. 네투가 아쉬워하는 얼굴로 웃으며 부모와 포옹을 나누자 객석에서는 기립박수가 터져 나왔다. 스포츠에서 볼 수 있는 가슴 뭉클한 드라마와 다를 바 없는 광경이었다.

대회의 마지막. 인도계 미국인 학생인 카비아 시바샹카라(13·여·캘리포니아 트레일중 8학년)는 ‘종교나 정치 등에 냉담한’이라는 뜻을 가진 ‘laodicean’을 맞혀 우승을 차지했다. 참가자들은 아직 인사를 나누지 못한 친구들과 사인을 주고받거나 가족들과 기념 촬영을 하며 오래도록 아쉬움을 달랬다. 다양한 인종, 국가가 참여한 ‘영어 올림픽’을 방불케 했다.

워싱턴DC(미국)=최은혜 기자

스크립스 내셔널 스펠링비(Scripps National Spelling Bee, www.spellingbee.com)

미국 스크립스(E W Scripps)사가 주최하는 영어 철자 맞히기 대회. 올해 82회째를 맞는 이번 대회에는 1000만 명의 초·중학생이 지역 예선에 참가했으며 미국·캐나다·뉴질랜드·중국·한국 등 총 13개국 293명의 학생이 지역예선을 거쳐 본선에 올랐다. 우승자는 총 4만 달러의 장학금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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