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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문화유산 답사기]16.문흥리 고인돌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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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우리는 북한을 방문하기 앞서 미리 답사 희망 유적지를 구체적으로 명기해 신청했다.다만 고인돌만은 "평양 인근의 고인돌" 이라고 포괄적으로 제시했다.북측 안내단은 일정표를 짜면서 이 막연한 요구사항이 몹시 부담스러웠던 모양이다.그들은 우리의 조사활동에 최대한 협조하려고 노력한 흔적이 역력했다.

안내단장 격인 안창복 참사가 "뿌루스 (플러스) 는 있어도 미누스 (마이너스) 는 없습니다" 라고 말한 것은 과장이 아니었다.그런데 평양 인근엔 무려 1만기의 고인돌이 있으니 이 모호한 요구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고민스러웠던 것 같다.

우리나라는 고인돌의 나라다.청동기시대 지배층의 무덤으로 생각되고 있는 이 고인돌은 동아시아 지역에서는 중국의 랴오둥 (遼東) 과 산둥 (山東) , 일본의 규슈 (九州)에 약간 있을 뿐 주로 한반도 전역에 퍼져 있는 우리나라 고유의 거석 (巨石) 기념물이다.북한엔 약 2만기, 남한엔 어림잡아 7만~8만기 정도가 확인되고 있다.

2천~3천년 전 유물이 10만점이나 있는 셈이다.

나는 세계 미술사의 지평에서 한국 미술을 평가할 때 당당히 내세울 수 있는 첫번째 유물은 고인돌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그 중에서도 북방식 고인돌이 미술사적으로 주목받을 만하다고 생각해 왔으니 평양에 와서 그걸 답사 안하면 무얼 하겠는가.그러나 서울에 앉아서는 멋진 것을 고를 정보가 없기 때문에 그냥 포괄적으로 요구한 것이었다.

리정남선생은 나의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 구체적으로, 그것도 학술적으로, 더욱이 고고학적으로 물어왔다. "어떤 고인돌을 보길 원하십니까? 오덕 (五德) 형.침촌 (沈忖) 형.묵방 (墨房) 형을 하나씩 보시겠습니까?" 남한에선 고인돌을 북방식과 남방식으로 나눠 설명하고 있다.

남방식은 밑받침이 낮은 바둑판 모양이고, 북방식은 탁자 모양을 가리킨다.한강을 경계로 해 분포가 다른 줄 알고 그렇게 이름을 붙였는데 이제는 북방식이 전남 나주에서 나오고, 남방식이 평북 태천에서 발견되니 의미전달에 혼란만 일으키는 쓸모없는 학술용어로 됐다.그걸 아직도 못 버리고 있다.

북한에선 1970년에 석광준이 '우리나라 서북지방 고인돌에 관한 연구' 를 발표하면서 북방식을 오덕형, 남방식을 침촌형이라고 부른 것이 공식적인 학술용어로 됐다.북방식은 황해북도 연탄군 오덕리에서 그 전형을 찾을 수 있고, 남방식은 황주시 침촌리에서 많이 발견돼 그렇게 부르게 된 것이다.이후 침촌형 중에서 무덤칸을 지상에 만들고 납작돌을 덧쌓아 벽체를 이룬 새 유형이 조사돼 묵방형이라 분리해 부르고 있다.

이는 평북 개천군 묵방리에 많이 산재해 있는 것으로,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바로 리정남선생이 1985년 발표한 '묵방리 고인돌에 관한 몇가지 고찰' 에서 연유한 것이었다.리선생은 그럴 정도로 이 분야의 권위자였다.나는 리선생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리선생님, 나는 그런 고고학적 조사가 아니라 미술사적으로 주목될 만한 것을 보고 싶습니다." "고인돌을 미술사적으로 보다니요?" 언뜻 생각하면 고고학과 미술사가 비슷한 학문 같지만 정반대 성격을 드러낼 때가 적지 않다.

고고학은 형태의 내부에 주목하지만 미술사는 겉모습에 더 관심이 많다.결과적으로 고고학은 무덤을 많이 다루고 미술사는 상대적으로 삶에 더 치중한다.

그중 큰 차이는 고고학은 보편적인 것, 기본적인 것을 찾아내려고 하는데 미술사는 특수한 것, 빼어난 것을 골라낸다.한마디로 거칠게 말해 고고학은 유물의 속을 다루고, 미술사는 유물의 멋을 추구한다.

"이를테면 멋지게 생긴 오덕형 고인돌이라든지, 고인돌이 구릉에 떼무덤으로 장관을 이룬다든지, 최근에 발견됐다는 별자리 무늬가 있는 고인돌 같은 거요. " "아, 알겠습니다.교수선생이 미술사가이면서 고인돌을 좋아하는 이유를. 그런 거라면 일정표 안에서 다 볼 수 있습니다.

멋진 고인돌, 멋진 고인돌 하시니 우선 문흥리 (文興里) 고인돌부터 봅시다. "

그리하여 우리는 첫번째 고인돌로 문흥리 고인돌을 답사하게 됐다.문흥리 고인돌은 단군릉 입구에 있는데 양지바른 구릉 위에 당당하게 자리잡고 있는 앉음새부터 빼어나다.언덕 아래서 올려다 볼 때도, 이쪽 산자락에서 건너다 볼 때도 마치 천신단 (天神壇) 이라도 되는 양 경건한 분위기가 일어난다.

본래는 굄돌 (支石) 이 4면에 모두 받쳐 있었지만 앞 뒷면이 떨어져 나가는 바람에 양 측면의 면석 (面石) 위에 상큼히 올라앉은 덮개돌이 마치 심플하게 디자인된 조선시대 경상 (經床) 을 연상케 한다.

현대미술의 어떤 설치미술가도 이런 구상을 해내지 못한 것 같고, 어떤 환경조각가도 이런 산언덕에 저토록 영험한 조형물을 세우지 못한 것 같다.대체 저 집채만한 돌들을 어떻게 운반해 왔단 말인가? 내가 이제까지 본 고인돌 중에서 가장 잘 생겼다고 생각되는 것은 비록 사진으로만 보았지만 황해남도 은율군 관산리의 고인돌이 첫째고, 그 다음이 이 문흥리 고인돌, 그리고 강화도 부근리 고인돌이 셋째쯤 될 것 같다.

또 북한 답사 열하루 일정 중 문흥리 고인돌은 강서대묘 다음으로 감동적인 유적이었다. 대부분의 고인돌들이 그러하듯 문흥리 고인돌 역시 서너기가 줄지어 있는데 나머지는 모두 파괴돼 내부를 드러내고 덮개돌이 밀려났다.그로 인해 문흥리 고인돌은 오히려 폐허의 신비와 연륜 속에 더욱 오롯이 빛난다.

나는 고인돌 덮개돌을 어루만지면서 문흥리 들판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가을바람을 온 몸으로 맞받으며 이 신비한 청동기인들의 설치미술품을 마음껏 체감했다.나는 리선생께 감사의 뜻을 실어 물었다.

"역시 고인돌은 오덕형입니다. " "그렇고 말고요. " "그런데 그 오덕리 고인돌은 이번에 가 보기 힘듭니까?" "오덕리 고인돌요? 그건 잠깐 미역감으러 갔습니다. " "미역감으러 가다니요?… 아! 저수지에…. " 오덕리에 저수지가 생겨 물에 잠겼는데 어쩌다 날이 가물면 잠시 드러내기도 한단다.

그날 돌아오는 차안에서 리선생과 나는 우리나라 고인돌의 위대함에 대해 경쟁하듯 서로 자랑을 말했다.그러다 리선생은 아까 말한 농담이 남한에 전해지면 흉떨릴까 걱정된다고 했다.그래서 난 단호하게 말했다.

"리선생 염려 마십시오. 전라남도 승주 주암댐에는 고인돌 1백개가 미역은 고사하고 그대로 수장됐답니다.누가 누굴 흉보겠어요. 오히려 리선생의 넉넉한 유머 감각에 놀랄걸요. "

글 = 유홍준 〈영남대교수·박물관장〉· 사진 = 김형수 〈통일문화연구소 차장〕

※다음회는 "룡곡리 고인돌 무덤떼"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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