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기자 칼럼]고속철 건설 곁꾼들은 빠져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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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돈.명예.승진.신기술…. ' 경부고속철도에는 '잿밥' 이 많았다.이름을 남기려 임기내 착공을 고집한 대통령. 뇌물 시비를 우려해 차량 선정을 대책없이 늦춘 또 다른 대통령. 능력은 시속 1백㎞ 수준인데 3백50㎞ 기술을 무모하게 주장한 기술자들. '고속철 = 승진기회' 로 본 일부 관리. 당국의 입맛대로 타당성을 억지 입증해 준 전문가들. 이들은 10년동안 2조4천억원짜리 고속철 향연을 벌였다.

또 있다.건설공단 주요 자리는 돈줄을 쥔 경제기획원 출신 이사장.부이사장, 감사원 출신 감사, 관련 부처 퇴직공무원.정치권 낙하산 인사들이 점령했다.

이들은 제각각 정치권에 줄서기를 하며 고속철을 불구로 만들었다.

그러나 이런 '꾼' 들 틈에서 고생은 고생대로, 욕은 욕대로 뒤집어쓴 사람들이 있다.고속철 관련 기사를 쓸 때마다 기자는 이들 때문에 번민해야 했다.부실 고속철의 주범은 다 놓치고 기술자들만 매도하는 게 아닌지…. 정치권.언론에서 고속철 문제가 터지면 해명은 항상 기술자들 몫이었고, 그들은 안팎으로 설명하느라 시간을 다 뺏겼다.언제부턴가 공단에선 동료끼리도 대화가 단절되기 시작했고, 지친 기술자들은 하나 둘 공단을 떠났다.그 자리는 외국인들로 메워졌다.

이제 정부가 고속철 개선안을 7월 발표한다.그동안 문제가 제기될 때마다 "몰랐다.잘못했다" 라는 솔직한 답변 대신 '편법.잔수' 로 땜질을 일삼은 고속철이 이번엔 정말 새로 태어날 수 있을까. 누가 봐도 기회는 이번뿐이다.

개선팀에 다시 '꾼' 이 끼어들지 말아야 한다.일본은 지금도 신칸센 (新幹線) 을 설계한 시마 히데오 (島秀雄) 기사장을 철도인의 영웅으로 떠받든다.

수십조원짜리 고속철을 만들면서 우리는 그런 기술자를 가질 수 없단 말인가.

고속철에 자유를 주자. 기술자들이 역사적 소명의식을 가지고 고속철의 새로운 노선.기술.개통시기를 정하도록 맡겨보자. 2000년 이전에 끝낼 방안을 혹시 기술자들이 찾을지도 모른다.

필요하다면 속도도 양보하고, 최고의 철도가 아닌 검소한 철도가 돼도 좋다.안전하고 수익성이 있는 건설안을 자유롭게 제안하도록 국민.정치가.전문가는 한발 물러서 있자. 그런 다음 그들이 제안한 대안이 국가 장래에 보탬이 된다면 승복하겠다는 자세를 갖자.

음성직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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