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소연 vs 최혜용, 질투는 나의 힘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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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호 16면

‘질투는 나의 힘’.
2003년 개봉했던 한국 영화다. 요절한 시인 기형도의 시 제목이기도하다. 그런데 필자는 이 문구를 들을 때마다 떠오르는 이가 있다. 바로 대한민국의 여자골퍼다. 질투와 대한민국 여자골퍼가 무슨 관계냐고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필자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질투’야말로 한국 여자골프 발전의 원동력이라고.

정제원의 캘리포니아 골프 <61>

다른 사람들에게서 “한국 여자골프가 그토록 강한 이유가 뭐냐”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필자는 이렇게 대답해 왔다. 지난 10년간 눈부신 발전을 거듭해 온 국내 여자골프계를 폄훼하는 것 아닌가. 결코 아니다.

지난 24일 끝난 KLPGA투어 두산매치플레이챔피언십 결승전을 돌이켜보면 수긍이 갈 것이다. 이날 결승전은 대한민국 골프 역사에 남을 만한 명승부였다. 열아홉 살 동갑내기 유소연과 최혜용의 매치플레이 맞대결은 마치 용과 호랑이의 싸움을 연상시켰다. 하늘색 옷을 입은 최혜용과 붉은색 옷을 받쳐 입은 유소연의 우승 다툼은 물과 불의 대결처럼 보이기도 했다. 해가 뉘엿뉘엿 질 때까지 말 그대로 불꽃 튀기는 대접전이 이어졌는데, 두 선수는 애가 바짝바짝 탔겠지만 갤러리 입장에선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었다.

특히 두 선수의 심리전은 이날 경기의 하이라이트였다. 유소연과 최혜용은 국가대표 시절 한솥밥을 먹었던 단짝이자 숙명의 라이벌. 지난해엔 하나밖에 없는 신인왕 자리를 놓고 시즌 내내 대결을 펼쳤다. 라이벌답게 두 선수는 이날 무려 27홀 경기를 치르면서도 한마디 말을 나누지 않았다. 두 선수 모두 상대방에게 컨시드를 주는 데도 인색한 편이었다. ‘적어도 너에게만은 질 수 없다’는 의지가 샷을 할 때 마다 묻어 나왔다.

한국 여자골프계에서 대표적인 라이벌은 박세리(32)-김미현(32)이다. 어린 시절부터 대회 때마다 마주쳐야 했던 맞수 중의 맞수다. 필드는 물론 골프장 밖에서도 아옹다옹하는 경우도 많았지만 선의의 경쟁을 통해 두 선수의 기량은 발전을 거듭했다. 1998년 박세리가 LPGA투어 US오픈에서 우승하자 김미현은 이듬해 LPGA의 문을 두드렸다. ‘네가 하는데 나라고 못할쏘냐’ 하는 생각이 밑바탕에 깔려 있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1세대인 김미현-박세리에 이어 안시현(25)-김주미(25)도 숙명의 라이벌로 불린다. 학창 시절엔 김주미가 한발 앞서 나가는가 싶었지만 LPGA투어 우승은 안시현이 먼저 해 버렸다. 2003년 나인브릿지 클래식에서 깜짝 우승한 것이다. 이를 계기로 안시현이 미국 무대에 진출하자 이번엔 김주미가 라이벌의 뒤를 따랐다. 김주미가 2006년 LPGA투어 개막전에서 우승한 것을 ‘질투’의 힘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언젠가 사석에서 여자골퍼의 아버지들과 ‘질투’를 주제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장정ㆍ이선화ㆍ최나연의 아버지를 비롯해 그 자리에 있던 모든 골프 대디가 대한민국 여자골프 발전의 원동력이 ‘질투’라는 데 동감했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식이 아니라 ‘네가 하면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대한민국 여자골프의 위상을 세계 정상급으로 끌어올렸다는 해석이다. 경쟁이 없으면 발전도 없다. 최혜용과 유소연의 매치플레이 맞대결이 다시 한번 일깨워 준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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