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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근한 옛것에 기댄 낯선 새로움 시·공간이 켜켜이 쌓인 ‘겹의 건축’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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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호 31면

①경복궁 돌담 길 건너 나지막한 한옥인 학고재. 높은 가로수와 대조적이다. 왼쪽 창 없는 붉은 벽면도 한옥과 연결되는 전시장이다. ②전시공간 천장은 한옥의 지붕 구조와 전시 벽면과 같은 흰 면으로 이루어졌다. 두 개의 한옥 지붕이 만나는 부분에 긴 천창을 두어 자연광선이 들어오게 했다. ③한옥과 네모난 전시실 사이에 난 문을 통해 옥상으로 오르면 옥탑방을 만나게 된다. 옥상에선 학고재 주변 풍광을 즐길 수 있다. 신동연 기자

경복궁 동쪽, 북촌의 가장자리. 미술관과 갤러리가 밀집된 소격동 거리에 한옥 모양의 갤러리가 있다. 학고재다. 이곳에서 10년 이상 갤러리를 운영했지만 처음 이 집은 현대 미술품을 전시하기에 적합한 공간은 아니었다. 두 채의 일자 한옥이 사이에 여유 공간 없이 놓인 듯한 듯한 이상한 모습이었다. 1988년에 세워진 이 집은 보존할 만한 역사적인, 또는 건축적인 가치가 있는 한옥은 아니다. 하지만 건축가 최욱은 한옥을 철거하지 않고 리노베이션과 신축을 통해 학고재가 필요한 전시공간을 새로 만들었다. 한옥에 기대면서, 또 그것에 반하면서 옛것과 새로운 것이 겹쳐 있는 건축을 만들었다.

사색이 머무는 공간 ⑪ 경복궁 옆 갤러리 학고재

최욱은 이런 ‘겹의 건축’에 대해 잘 아는 건축가이다. 그가 건축을 공부한 베네치아는 시간·재료·공간이 겹겹이 쌓여 있는 건축을 흔히 볼 수 있는 곳이다. 베네치아의 유명한 산마르코광장은 12세기에 현재 광장의 모양이 만들어졌다. 광장을 둘러싼 건물들은 700년에 걸쳐 짓고, 헐고, 덧붙여 지금의 모습에 이르렀다. 살아 숨을 쉬는 광장이기 때문에 지금도 조금씩 덧붙이고 떼면서 사용하고 있다. 세계인들이 베네치아를 사랑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다.

베네치아의 스케일은 아니지만 경복궁을 마주보고 있는 이곳에도 시간의 겹이 잠재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는 아이러니가 있다. 베네치아가 너무도 유명해서 일까, 오랜 시간이 만든 베네치아의 건축에 익숙하다면 학고재의 모습은 오히려 낯설고 새롭다.

베네치아를 만든 700년의 시간
학고재가 낯설게 느껴지는 이유는 이질적인 것들의 만남 때문이다. 기존의 것과 새로운 것이 서로 다르다는 뜻이다. 한옥의 목구조는 긴 나무 부재가 서로 끼여 있는 시스템이다. 기둥·보·서까래 등이 연결되어 열려 있고 안정된 구조다. 이것을 가구식 구조라고 부른다. 여기에 건축가는 건물 안팎으로 새로운 수평면을 덧붙였다. 가로와 골목으로 향한 건물의 외관에는 단정한 벽면을 만들었다. 한옥의 지붕과 창 부분을 남기고 한옥의 외벽에 벽돌면을 덧붙였다. 벽돌면은 한옥 옆에 있는 작은 전시실, 골목 안으로 한 켜 들어간 신축 전시관으로 이어진다. 길과 골목의 공간을 단단하게 만들어주는 벽면이다. 건축가는 100년 된 중국산 벽돌을 켜서 두터운 타일처럼 사용했다. 잘 익은 단감색 벽돌은 흔히 볼 수 있는 색이 아니어서 눈에 띈다. 동시에 구운 벽돌의 자연스러움을 함께 갖고 있다. 시간이 지나 벽돌 색이 조금씩 진해지면서 익숙해질 것이다. 낯설면서도 친근함을 함께 간직하는 학고재의 매력이다.

면을 구성하는 건축가의 작업은 내부 공간에서도 보인다. 내부 전시공간에는 그림의 배경이 되는 하얀 벽면, 그리고 조명과 채광을 조율하는 천장 면을 설치하였다. 한옥 내부의 열린 지붕 구조를 일부 드러내고 일부는 가렸다. 병치된 본래 한옥의 내부공간을 하나로 통합하면서 필요에 따라 기둥을 없앴다. 지붕을 받치고 있는 기둥이 하얀 면으로 덧씌워져 벽면과 천장이 구성하는 기하학으로 편입된다. 두 개의 한옥 지붕이 어색하게 만나는 부분에 긴 천창을 두었다. 예전에 전시장을 갈라놓았던 한옥 지붕 사이의 틈새가 공간을 통합하는 빛의 상자로 대치되었다. 외부에서 한옥의 가구식 구조가 조적식 벽면과 병치되었다면 내부에서는 목조의 자연스러운 운치가 기하학의 미학, 면과 빛의 미학과 병치되었다.

입구에서 긴 한옥 개조 공간을 지나 네모 난 전시실로 들어간다. 예전에 사무실로 사용했던 집을 전시실로 개축하였다. 건물의 바닥을 낮추어 천장이 높은 하나의 단정한 방을 만들었다. 이 방과 한옥을 개조한 긴 전시실 사이에 바깥 세계를 감지할 수 있는 틈새를 두었다. 틈새 한쪽으로는 좁고 긴 창을 통해 경복궁 돌담길의 모습이 잡힌다. 다른 한 쪽은 바깥으로 나가는 문이다. 이 문을 나가면 옥상으로 올라가는 계단과 별채로 이어지는 좁은 통로와 만난다. 계단을 따라 옥상에 올라선다. 옥상에서 만나는 지붕의 풍경이 학고재 건축의 또 다른 매력이다. 건축가는 옥탑에 박공 모양의 지붕을 가진 작은 다실을 만들었다. 작은 집 옆에 또 작은 집, 집 위의 또 다른 집. 건축가의 말대로 그는 ‘마을 풍경’을 만들었다.

학고재를 고치고, 덧붙이고, 새로 집을 짓는 건축가의 논리는 명쾌하다. 큰 것 하나보다는 작은 것 여러 개를 만든다. 재료, 구법, 덩어리가 다른 것들은 서로의 차이를 명쾌하게 보여준다. 서로 다른 것들을 수평·수직면으로 엮어 준다. 건축가는 일관된 면의 미학으로 학고재 안팎을 움직여 다니는 관람자의 체험을 조율하였다. 탁월한 미학이다.

여러개의 작은 공간으로 서로 차별화
이렇게 섬세하게 조율된 학고재는 아름다운 건물인가?
우리는 잡지와 영화 속의 젊은 남녀들을 아름답다고 예찬한다. 최근 건축이 대중매체를 타면서 건물의 아름다움을 쉽게 이야기한다. 이것은 하나의 통속이다. 꽃보다 아름답다는 카피처럼 별생각 없이 내뱉는 말이다. 현대 사회에서 건축이 아름답기란 대단히 어렵다. 아름다운 한국의 현대 건축이 무엇인지 우리는 아직 모른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학고재의 부분 부분에 대해서는 아름답다고 할 수 있다. 빛을 스며 들이고 빛을 발산하기도 하는 학고재의 벽면과 천장은 아름답다. 하지만 이질적인 것들의 만남이 만드는 학고재의 도시 풍경을 아름답다고 하기에는 아직 익숙지 않다.

학고재 건너편 경복궁의 근정전과 경회루는 아름답다. 우리는 그것이 아름답다는 것을 안다. 베네치아의 왕궁도 아름답다. 우리는 경복궁과 베네치아가 왜 아름다운지를 설명할 수 있다. 수백 년에 걸쳐 건축가와 학자, 이를 후원한 귀족과 이를 찬미한 대중이 완성한 미학이다.

하지만 학고재에서 건축가가 추구하는 미학은 아직 미완의 미학이다. 우리는 우리의 도시에서 옛것과 새것이 공존하는 것을 아직까지도 본 적이 별로 없다. 옛것은 고정불변의 것이 아니다. 옛것의 새로운 가능성을 탐구하는 것이 아직은 우리에게 미지의 세계다. 그래서 불안하다. 미래의 모습을 안다고 주장하는 오만한 예지자들, 몇몇 개인의 이익을 위한 개발의 논리 앞에서 모른다는 말은 위태롭기 짝이 없다. 모든 것을 다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믿어서는 안 된다. 그들은 과거를 되풀이할 뿐이다. 우리의 베네치아는 어떤 모습일지 모른다. 그것을 만들기 위해서는 부단한 노력이 필요하다. 그것은 분명 베네치아와 매우 다른 모습일 것이고 경복궁과도 매우 다른 모습일 것이다. 모르기 때문에 열린 미래가 더욱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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