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행의옴부즈맨칼럼]미흡한 '밀레니엄 버그'보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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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이른바 '밀레니엄 버그 (millennium bug)' 관련기사를 보면서 나는 국내 신문과 외국 신문의 차이뿐만 아니라 외국 정부의 대책과 우리 정부의 대책에 엄청난 격차가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가령 지난주에 보도된 것만 보더라도 토니 블레어 영국총리는 '밀레니엄 버그' 대책으로 앞으로 1년간 약 2만명의 컴퓨터 프로그램전문가를 집중 양성하고, 일련의 대책비로 공공부문에서만 30억파운드 (약 7조5천억원) 의 자금을 투입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뿐만 아니라 캐나다정부도 지난주 '밀레니엄 버그' 특별대책반을 발족시키고 우선 14억4천만달러 (약 2조1천6백억원) 의 예산을 편성했다고 공표했다.

공교롭게도 우리 정부도 거의 같은 시기에 대책을 발표한 바 있는데 그 내용은 두가지로 요약된다.

하나는 민관 (民官) 이 참여하는 '컴퓨터 2000년문제대책협의회' 를 구성해 99년 상반기까지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를 위해 올해 정부부문에서 1백20억원의 재원이 소요될 것으로 추산해 이미 예산에 편성된 57억원 외에 추경예산에 이를 반영하는 방안을 검토중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정부의 대책과 영국이나 캐나다의 대책을 비교해 보면 문제에 대처하는 자세에 커다란 괴리 (乖離)가 있음을 느끼게 된다.

물론 어떤 문제에 대한 비교를 하는 데 있어 단순하게 평면적으로 하는 것은 금물 (禁物) 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영국같은 나라에서 행정수반인 총리가 직접 나서 적극적으로 대책을 발표하는 자세와 우리의 그것은 비록 평면적이라 할지라도 비교의 대상이 되고도 남는다고 아니할 수 없다.

거기에 더해 대책에 소요되는 비용에 이르러서는 우리의 1백억 단위와 영국의 7조 단위에 어안이 벙벙해질 따름이다.

정부의 대책은 그렇다 치더라도 그것을 커버하는 매스컴의 자세에 이르러서는 문제의 심각성을 더욱 느끼게 된다.

이런 심각성은 우리나라 언론의 체질과도 관련된 것이라 할 수 있는데 보도의 측면에서 그 체질을 말한다면 그것은 너무나 오랫동안, 이른바 관급성 (官給性) 기사 내지 발표기사에 순치 (馴致) 됐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사실 '밀레니엄' 관련기사를 다룬 우리나라의 유수한 신문들을 보면 거의 같은 지면에 같은 내용을 같은 비중으로 정부의 발표기사 중심으로 편집한 게 고작이었다.

어느 한 신문이라도 정부의 대책을 구체적으로 분석하고 문제를 심층분석한 곳이 있는가를 찾아보았으나 유감스럽게도 그런 기사를 보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영국이나 캐나다정부의 대책과 관련한 외신 (外信) 을 취급한 신문조차 극히 소수에 불과했다.

나머지 대다수 신문들은 그 기사를 간과하거나 묵살해 버린 꼴이 되고 말았다.

하긴 '밀레니엄' 문제가 제기됐을 때부터 이 문제를 보도한 우리나라 매스컴의 자세는 적극적인 것이라고 평가받기 어려운 구석이 엿보였다.

물론 신문에 따라서는 단속 (斷續) 적으로 외신중심으로 보도한 곳도 있고, 또 특집으로 이 문제를 다룬 신문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문제를 종합적으로 다루고 그것을 독자에게 알기 쉽게 전한 신문이 드물다는 것은 여간 안타까운 일이 아니다.

영어 (英語) 의 '밀레니엄' 이란 단어가 '천년의 기간' 을 뜻한다는 것은 구태여 풀이할 필요도 없겠지만 '천년' 단위의 기간이란 일반적으로 인식의 차원을 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거기에 더해 '밀레니엄' 이 지닌 기독교적인 의미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에겐 그 참뜻을 헤아리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고 여겨진다.

사실 사람들의 인식의 차원에 쉽사리 들어올 수 있는 기간이란 대개 '10년' 단위의 기간이나 '30년' 단위의 기간인 한세대 (一世代) 또는 1백년 단위의 1세기 (一世紀) 라고 일컬어진다.

이에 비해 1천년 단위인 '밀레니엄' 은 1세기를 10개 합친 것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밀레니엄' 을 한묶음으로 보는 것이 역사의 세계이고 종교의 개념이기도 하다.

흔히 '밀레니엄 버그' 라고 하면 단순한 컴퓨터의 문제인양 치부해 버리는 것이 매스컴의 일반적인 경향인데, 나는 문제가 그렇게 단순한 것으로 취급될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해 두고 싶다.

2진법 (二進法) 으로 구성된 컴퓨터가 98, 99로 연도를 기억 내지 인식했던 데서 오는 2000년의 오류, 다시 말해 00을 2000년으로 인식하지 않고 1900년으로 잘못 인식하는 데서 오는 혼란을 방지하자는 것으로만 '밀레니엄 버그' 를 파악해서는 안된다는 이야기다.

엄격한 의미에서 '밀레니엄' 이라면 2000년이 아니라 2001년이 기산점 (起算點) 이라 할 수 있다.

그런 뜻에서 2000년은 새로운 '밀레니엄' 의 시작이 아니라 지나가는 1천년의 종점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20세기와 21세기를 구분하는 데서도 마찬가지다.

21세기는 2001년부터 시작되는 것이고 2000년은 20세기의 끝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밀레니엄 버그' 라면 새로운 세기와 새로운 천년의 문제의 시발을 일컫는 것으로 일반화되고 있는 것이 세계적인 추세임을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그것은 2000년이 지니는 역사적 의미의 상징성을 생각할 때 우리에게 너무나 많은 것을 시사해 준다.

이번 '밀레니엄' 은 세번째 '밀레니엄' , 즉 3000년의 지복 (至福) 을 뜻하는 동시에 21세기의 시작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규행<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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