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아라리 난장 68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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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박태호 (朴泰鎬) 라 합니다.

저도 선배님들이 설치한 현수막 덕을 톡톡히 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좌판 걷고 난 뒤에 인사 드리고 저녁 대접 해드려야지요. " 세 사람을 일컬어 깍듯이 선배님이라 높여 부르고, 눈썹까지 덮이도록 깊숙이 눌러 쓰고 있던 야구모자를 냉큼 벗으며 허리를 조아리는 품이 본데없이 장바닥을 뒹굴어온 젊은이 같지는 않았다.

모자를 벗었을 때, 비로소 발견한 얼굴에서 짐작되는 나이는 스물일곱 아니면 여덟. 웃음 띤 얼굴에는 해맑은 풋기가 역력하게 남아 있어서, 세파의 고단한 질곡과 밀도있게 맞부딪쳐온 사람들처럼 음습하거나 황량한 징표는 찾아볼 수 없었다.

웃고 있었지만, 비굴하지 않아 오히려 귀공자와 같은 오만한 분위기가 그에겐 있었다.

초인사를 나눈 뒤, 그는 다시 모자를 깊숙이 눌러 써버렸는데, 철규와 나누고 있던 수작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던 변씨가 혼잣소리로 중얼거렸다.

나이는 어려 보이는데 무언가 사연이 있는 놈 같구만. 초인사를 나눌 때도 형님이나 아저씨로 지칭하지 않고 선배님이라고 불렀던 것도 장바닥에선 희귀한 인사법이었다.

도회적인 분위기와 판별력을 가진 젊은이가 틀림없겠는데, 구성진 나간다타령은 어디서 터득한 것일까. 시종 팔짱을 끼고 그를 바라보며 철규는 생각하고 있었다.

촘촘하게 내려쏘이던 햇살이 얼추 빛을 잃어갈 오후5시 무렵이었다.

장꾼들의 발길이 눈에 띄게 뜸해지자, 박태호라는 젊은이는 서둘러 좌판을 거두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난로가에 쭈그리고 앉은 봉환에게 소리 질렀다.

"선배님. 벌써 파장인데요? 내일은 어디로 가십니까?" "우린 평창이야. " "저도 따라가고 싶은데, 선배님들은 괜찮으시겠습니까?" 꽤나 붙임성있게 굴었지만, 봉환은 초장부터 시큰둥해 있었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 뽑더라고, 현수막 앞의 협소한 자리를 비집고 들어온 그의 좌판이 시종 북적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봉환은 수작 걸어오기만 기다렸다는 듯이 불퉁가지를 부리며 쏘아붙였다.

"행수한테 물어봐. 그걸 내가 어째 알어. " 봉환의 뒤틀린 심사를 알아챈 박태호는 더 이상 채근하지 않았지만, 좌판을 거두는 손놀림은 빨라졌다.

짐을 싸 동이는 솜씨도 제법 날렵하고 맵짜 보였다.

두 개의 봇짐을 장터 뒤편 방천둑에 주차해둔 용달차에 옮겨놓은 뒤, 세 사람이 좌판 거두는 것을 거들었다.

그러면서 선배님들에게 약속했던 저녁을 반드시 사야 겠다고 벼르는 것이었다.

밥을 사겠다던 약속은 얼떨결에 내뱉은 허튼소리였다 하고 훌쩍 떠나버릴 수도 있지만, 세 사람의 구성원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 도대체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고 속내를 털어놓았다.

겉으로 보아서는 전혀 일맥상통하는 것이 없어 보이는 세 사람의 동업이 어떻게 명맥을 유지하는 건지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는 박태호의 말은 그럴싸했고, 그렇고 보면 세 사람 자신들도 그것이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서 솔깃해진 것이었다.

개운치 않았던 마음을 고쳐먹기로 한 그들은 태호의 청을 받아들이고 우선 장터거리를 벗어나기로 하였다.

두 대의 차에 분승한 그들은 시가지를 빠져나와 영월에서 평창으로 가는 들머릿길이 되는 장릉으로 차를 몰았다.

태호가 장릉 앞의 술청거리에 단골로 다니는 값싼 식당이 있다고 유혹했기 때문이었다.

장릉 앞길 양 쪽에는 겉치장이 과장되어 오히려 초라해 보이는 이국적인 이름들의 카페나 술집들이 늘어서 있었다.

그 사이에 끼여 있는 맞춤한 막국수집으로 들어간 네 사람은 비로소 통성명을 나누었다.

태호는 얼굴까지 씻은 다음, 공손하게 허리를 굽혀 인사를 올렸다.

역시 짐작했던 대로 이목구비가 매우 뚜렷하면서도 상스럽지 않아 막된 젊은이가 아니라는 인상을 주었고, 말 씀씀이도 헤프지 않았다.

야간운전을 해야 할 봉환을 제외한 두 사람만 그가 권하는 술잔을 받기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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