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드라마 지역적 차별성 없어지고 평준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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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95년 방영된 SBS 드라마 '모래시계' 를 본 사람이면 '종도' 란 인물을 기억할 것이다.

비겁하면서, 의리도 없고, 싸움까지 제대로 못하는 '최악의 깡패' 말이다.

검사와 주인공 폭력배 태수는 전라도 출신이면서도 사투리를 전혀 쓰지 않는데 유독 종도만 진한 방언을 구사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지역 차별적 발상" 이라고 발끈했었다.

종도역을 맡았던 탤런트 정성모는 지난달 시작한 KBS 드라마 '맨발의 청춘'에 또다시 '강수' 라는 이름의 깡패 로 등장했다.

검은 셔츠를 입고 강한 전라도 말씨를 구사하며 건들거리는 그의 겉모습은 종도 시절과 구별이 되지 않을 정도다.

하지만 그의 '시뮬라크라' (모사된 이미지) 는 3년 사이 적지 않은 변신을 했다.

중간보스급 깡패인 강수는 부하들을 사랑하는 '따스한' 두목이 됐다.

그를 따라다니는 고향동생들도 다른 서울폭력배보단 훨씬 의리있고, 인간적이다.

이를 두고 '정권교체에 따른 사투리 위상 변화' 라 얘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더욱이 MBC 드라마 '그대 그리고 나' 에서의 경상도 사투리 수난 상황과 맞물려 그런 시선은 더 강해지고 있다.

'그대…' 에선 경북 영덕 출신의 주인공들은 전부 서울 말씨를 쓰는데 '계순' (이경진 분) 을 괴롭히는 사기꾼 부부만 경상도 사투리를 사용하고 있는 것. 특히 '이사장' (이원재 분) 은 계순을 무자비하게 때리고, 아들 뻘 되는 '민규' (송승헌 분)에게 죽도록 얻어맞는 등 보기 민망할 정도다.

이 외에도 '정 때문에' '육남매' '남자 셋 여자 셋' '행복을 만들어 드립니다' '아름다운 죄' 등에서 비슷한 현상들이 목격됐다.

제작진들은 "우연의 일치일 뿐" 이라고 입을 모은다.

'맨발의 청춘' 윤흥식 CP (책임 프로듀서) 는 "특정 도시의 이미지 손상을 우려해 강수의 고향으로 '창천' 이라는 가상 지명을 만드는 등의 작은 배려만 했을 뿐" 이라며 "지역 차별.역차별 발상은 결코 아니다" 고 말했다.

'그대…' 의 이재갑 CP 역시 "극중 리얼리티를 위해 사투리를 쓰게 된 것" 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한 중진급 PD는 "방송이 권력의 종속변수가 됐던 건 사실" 이라며 "드라마도 무의식적으로 그런 영향을 받게 되는 것 아니냐" 고 얘기한다.

악당은 서울 사람일 수도 있고 충청도 사람일 수도 있다.

또 경상도.전라도 말씨를 써도 이상할 게 없다.

오히려 연기자의 사투리가 오해의 소지가 되는 현실이, 또 그 현실을 불러온 과거가 우스꽝스러운 것이다.

이제 두 드라마의 사투리 주인공들은 사라진다.

강수가 체포되면서 '맨발의 청춘' 은 막을 내리고 '그대…' 의 사기꾼 부부도 다음달부턴 나오지 않을 예정이다.

이제 '우연의 일치' 가 사라지고 나면 사투리에 대한 괜한 편견도 잠잠해지리라.

강주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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