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일동포 인권 업그레이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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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뉴스 분석 42만여 재일동포들이 더욱 당당한 모습으로 일본 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게 됐다. 일본 정치권이 재일동포 차별의 상징이었던 ‘외국인등록증 휴대 의무’를 폐지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재일동포는 외국인등록증 휴대 의무 때문에 늘 불안감을 갖고 살아왔다. 민단 강우석 조직국장은 “재일동포가 교통위반을 하면 경찰은 먼저 운전면허증 제시를 요구한 뒤 이름이 한국식으로 써 있으면 외국인등록증을 제시하라고 요구하곤 한다”고 말했다. 외국인등록증을 휴대하고 있지 않으면 현행범으로 취급받아 벌금 10만 엔(약 130만원)이 부과된다. 그래서 민단 등 재일동포 사회는 “우리도 세금 납부 등 의무는 모두 다하는데 국적이 일본이 아니라는 이유로 차별 대우를 받고 있다”며 외국인등록증 휴대 의무 철폐를 요구해 왔다.

재일동포가 이런 대우를 받은 것은 1947년부터다. 일본 정부가 태평양전쟁에 동원했던 식민지 출신 국민의 처리를 서두르면서 외국인 등록령을 만들어 재일동포들에게 외국인등록증을 발급해 주고 휴대를 의무화한 것이다. 당시 200만여 명의 재일동포 가운데 귀국하지 않은 60만여 명은 등록증을 발급받고 ‘특별영주자’로 남았다. 이들에게 외국인등록증은 ‘식민지 출신 증명서’나 다름없었다. 이런 차별은 2000년대 초까지 계속됐다. 외국인등록증은 취업·승진·개업·진학 등 온갖 분야에서 재일동포를 차별하는 수단으로 악용됐다. 이 때문에 재일동포 2~3세에선 일본 귀화가 늘고 있다. 권철현 주일대사는 “해마다 재일동포 7000~8000명이 일본으로 귀화하고 있다”고 말했다.

재일동포들은 부당한 대우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 왔지만 일본 정치권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다만 한류 바람이 본격적으로 불기 시작한 5~6년 전부터 일본 정부가 민단의 요청을 받아들여 강력한 단속이 느슨해졌을 뿐이다. 그래도 등록증 휴대 의무 규정이 살아 있는 한 재일동포의 마음은 늘 무겁다. 민단 관계자는 “일본에서 보수 우경화 바람이 불면 일본 정부가 언제라도 방침을 바꿔 집앞과 길목마다 신분증 제시를 요구할지 모르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이런 점에서 일본 정치권이 재일동포의 등록증 휴대 의무를 폐지키로 한 것은 93년 재일동포 지문날인제도 폐지에 이어 재일동포 인권 신장의 획기적인 이정표라고 볼 수 있다. 이 방안이 시행되면 42만여 재일동포(민단·조총련)와 1000여 명의 대만계 특별영주자들이 해당된다. 단기 거주하는 한국인이나 외국인들은 포함되지 않는다.

일본 정부는 당초 외국인 범죄·불법 체류를 구실로 외국인 관리를 강화하려 했다. 현재 지방자치단체가 발행하는 외국인등록증은 정부 차원에서 관리가 되지 않기 때문에 폐지하고 법무성 산하 입국관리소의 ‘재류 카드’로 대체하면서 재일동포에게는 ‘특별영주자증명서’를 발급해 소지를 의무화할 방침이었다.

민단은 자민당에 이 방침 철회를 요청했지만 거부당했다. 그런데 일본 제1야당인 민주당이 민단을 돕고 나섰다. 민단이 민주당에 철회를 요청하는 청원을 제출하자 민주당이 연립여당인 자민당·공명당에 요구해 관철시킨 것이다. 이명박 정부 들어 일본과의 우호 관계가 급진전된 것도 큰 힘이 된 것으로 보인다. 권철현 대사는 “재일동포 인권 개선의 새로운 시대가 열렸지만 앞으로 지방참정권 참여도 큰 과제”라며 “재일동포들은 일본 사회의 일원으로 의무를 다하는 만큼 권리도 보장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도쿄=김동호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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