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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아라리 난장 58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봉평에서 진부까지는 줄잡아 24㎞ 남짓한 노정이었다.

그러나 철규가 또 다시 국도로 갈 것을 고집했기 때문에 땅거미가 내리고나서야 진부에 당도할 수 있었다.

전등불이 켜진 진부읍내의 모습은 번창하기가 서울 변두리 시가지를 방불케 하였다.

밤거리를 보면, 강원도 산골에 갇혀 있는 작은 읍내라는 인상을 받을 수 없을 정도로 휘황한 불빛으로 번쩍거렸다.

다른 지방 생산품보다 전분 (澱粉) 이 많기로 소문난 감자와 당근, 그리고 고랭지 채소 재배가 주된 소득원인데다가, 주변지역에 서울 사람들이 수시로 들락거리는 위락시설이 촘촘하게 흩어져 있어 장이 서지 않는 무싯날에도 내왕이 번다한 고장이었다.

고랭지 채소재배로 만만찮은 소득을 챙기는 고장이어서 변씨가 즐겨 찾는 다방은 물론이었고, 간판만 레스토랑인 전문주점도 여럿이었다.

그들 주점에서는 맥주와 양주를 자배기에 쏟아 부어 국자로 떠마시는 파괴적이고 난폭한 주도가 유행한다는 소문도 없지 않았다.

붕어빵 몇 개로 낮의 허기를 가까스로 모면해오던 그들은 가을이면 고추시장이 열리는 구시장 초입에서 차를 멈추었다.

시선에 들어오는 땅거미식당이란 간판에 호감이 갔기 때문이었다.

변씨가 미닫이문 사이로 가만히 술청을 엿보고 나서 뒤에서 기다리던 두 사람에게 손짓하였다.

주방 아낙네가 즉석화로에서 손수 요리해주는 세발낚지 볶음요리는 뒤통수에서부터 진땀이 흐르도록 매웠지만, 온 삭신에 누적된 피로감을 빗자루로 쓸어내듯 단숨에 소탕해내는 폭력적인 쾌감이 있었다.

비빔밥으로 버무려 먹고도 남은 볶음요리를 그윽한 시선으로 내려다보고 앉은 변씨의 술게걸을 딱 잘라 외면하기 어려웠던 철규가 소주를 주문했다.

사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주방 아낙네가 술좌석 가녁을 맴돌며 세 일행에 대한 호기심을 거두지 않았으므로, 좌석에 끼어들고 싶은 그녀의 속내를 알아채고 또한 끌어당겨 합석을 시키고 말았다.

봉환은 그때부터 그녀에게 연거푸 소주잔을 안겼다.

처음엔 손사래를 치며 사양하던 아낙네였는데 시간이 흘러가자, 술기운 때문에 수직으로 상승된 배알을 부려 제 호주머니를 털어 소주를 두 병이나 샀다.

알고보니, 홀로된 두 여자의 공동출자로 식당을 경영하고 있었다.

주방 아낙네의 비위를 맞춰준 것이 계기가 되어 셋은 그날 밤, 땅거미식당의 방 하나를 빌려 유숙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사단이 생긴 것은, 이튿날 새벽이었다.

깊은 잠 속에서도 시궁창물을 퍼마시는 꿈을 꾸었을 만큼 기갈에 시달렸던 변씨가 잠에서 깨어난 것은 새벽 4시경이었다.

쇳덩이같이 무거워진 엉덩이를 추스르며 기어나가 부엌의 찬장을 뒤져 느끼한 수돗물을 양껏 받아 마시고 방으로 들어왔을 때, 분명 곁에 누워 있어야 할 봉환이가 온데간데 없어진 것을 깨달았다.

짚이는 구석이 없지 않았던 변씨는 까치발을 하고 가만히 안방의 미닫이 문을 열어 보았다.

한 여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는데, 술자리를 같이했던 주방 아낙네와 뒤엉키듯 누워 있는 사람이 봉환이란 것은 희미한 밤빛 속에서도 확연하였다.

두 사람은 호랑이가 업어가도 모를 만치 곯아떨어져 있었는데, 누워있는 자세가 가관이었다.

덮고있는 이불의 반대편 밖으로 하나씩의 머리가 돌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당장 방으로 뛰어들어 이불을 걷어붙이고 연놈을 싸잡아 혼찌검을 내려다말고 멈추어 섰다.

69자 형으로 누워있는 꼴도 웃음을 자아내는 것이었지만, 꼭두새벽에 소동을 피운다는 것도 허장성세 (虛張聲勢) 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여색이라면, 때와 장소와 상대의 늙고 젊음을 가리지 않는 봉환의 버릇은 한바탕의 소동으로 고쳐질 버르장머리도 아니었다.

가만히 방으로 돌아와 다시 누웠으나 잠은 이미 달아나버리고 말았다.

봉환이가 숨을 죽이고 방으로 돌아와 누운 것은 아침 6시가 지나서였다.

해장국까지 공짜로 얻어 먹고 땅거미식당을 나선 것은 오전 8시경이었다.

눈치를 보아하니, 철규는 지난 밤 봉환의 엽색행각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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