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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시 격하운동’에 제동 건 오바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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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2면

과거 정권에 대한 비판은 새 집권세력에 참기 어려운 유혹일 수 있다. 전임자의 실정을 까발림으로써 도덕적 우월성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전 세계에서 여러 모습의 격하운동이 벌어지는 것도 그래서다. 천수이볜(陳水扁) 전 대만 총통의 장제스(蔣介石) 격하운동, 노태우 정권 때의 5공비리 청산도 같은 맥락이다.

미국도 예외는 아니다. 최근 오바마 정권도 ‘부시 격하운동’에 열심이다. ‘테러와의 전쟁’이란 명분 아래 부시와 측근들이 묵인했던 각종 인권유린의 실상을 낱낱이 공개하고 있다. 그러나 그랬던 오바마 대통령이 13일 의외의 결정을 내려 주변을 놀라게 했다. 부시 정권 때 이라크·아프가니스탄 내 미군 교도소에서 자행됐던 수감자 학대 사진의 공개를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문제의 사진에는 이라크·아프간 반군들을 벌거벗긴 채 거꾸로 매단 모습 등 치욕스러운 인권유린의 실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당초 오바마는 사진 공개를 지지했었다. 부끄러운 과거를 만천하에 드러내는 게 곪아터진 환부를 도려내는 최선책으로 여겼던 거다. 그가 마음을 바꾼 건 “사진 공개 시 반미감정 악화로 미군이 큰 위험에 처할 수 있다”는 군부의 탄원 때문이었다. 물론 진보 진영에선 오바마에 대한 비난이 쏟아졌다. 부시 시대의 망령을 청산할 호기를 놓쳤다는 원성이 자자했다. 그러나 오바마는 흔들리지 않았다. 부시 진영을 궁지로 몰아넣을 수 있다는 정략적 계산보다 군인들의 생명을 더 소중하게 여긴 것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 일가와 관련한 비리 의혹이 커져 가는 요즘이다. 비리가 확인될수록 노 전 대통령에 대한 격하운동이 본격화될 게 틀림없다. 물론 비리가 있다면 합당한 죗값을 치러야 한다는 데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다만 우려되는 건 노 전 대통령과 관련됐거나 그를 지지했다는 이유로 마녀사냥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점이다. 특히 건전한 진보적 시민단체들까지 피해를 볼까 걱정이다. 마오쩌둥(毛澤東) 사후 격하운동이 들끓자 집권자 덩샤오핑(鄧小平)은 이를 막았다. 그가 우려했던 건 국민의 분열이었다. 우리도 곱씹어볼 대목이다.

남정호 뉴욕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