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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홍준의 북한 문화유산 답사기]8.보현사 8각13층석탑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2면

향산호텔에 여장을 풀고 우리는 당연히 제일 먼저 보현사 (普賢寺) 를 찾아갔다.

묘향산 보현사는 북한에서 가장 큰 절일뿐만 아니라 북한 불교의 총림 (叢林) 격이었다.

남한으로 치자면 서울의 조계사에 송광사나 해인사를 합친 위상이라고나 할까. 아무튼 북한에서 절 하면 보현사였다.

묘향산 산마루로부터 흘러내린 향산천을 따라 보현사를 찾아 사뭇 계곡 안쪽으로 오르자니 지금 여기가 남한땅인지 북한땅인지를 가늠치 못할 정도로 우리나라 산사 (山寺) 의 전형적인 진입로를 보여준다.

평소 나는 산사의 미학은 건물 자체보다 자리 앉음새에 있고, 산사의 답사는 진입로부터 시작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는데 보현사 또한 예외일 수 없었다.

스님들 사회에서 유머를 섞어 만든 말중에 '입해출송 (入海出松)' 이라는 말이 있다.

해인사는 들어갈 때가 멋있고, 송광사는 나올 때가 기분 좋다는 뜻이다.

산중에 오래 산 사람들의 경험에서 나온 미적 판단이니 틀릴 리 없을 것인데 보현사는 들어갈 때고 나올 때고 사람의 가슴을 호방하게 열어주는 기상이 있었다.

진입로만 보자면 지리산 화엄사를 많이 닮았지만 열두판 화판 (花瓣) 의 꽃숲 속에 앉은 자태는 문경 봉암사 같다고 하겠는데, 절의 크기는 고창 선운사처럼 크도 작도 않은 쾌적한 규모였다.

보현사의 당우 (堂宇) 는 일제시대만 하더라도 31본사의 하나로 50여채 됐지만 6.25때 반 이상이 불타고 전후에 복구해 새로 단장해 놓은 것이 20여채 됐다.

북한 당국은 관광 차원인지, 아니면 박물관 교육 차원인지 보현사 경내에 불교역사박물관을 세우고 전국 사찰에서 나온 많은 불교유물을 여기에 보관.전시하고 있다.

내가 방문했을 당시 소장품은 총 5천4백30점이라고 했는데 불상이 1백1개, 불화가 84점, 불교장식품이 1백49점, 그리고 불경목판 원판과 팔만대장경 목판인쇄본 완질 1천1백59권 등이 있었다.

그 중에는 남한 학계에 금강산 출토 보살상으로 알려진 고려말기 대표적인 금동보살상도 있었고, 피현군 불정사에 있던 다라니 석당 (石幢) 도 있었고, 또 금강산 유점사의 범종도 있었으니 가위 북한 불교미술의 센터 구실을 하도록 집결시켰다고 하겠다.

그런 것중 보현사의 역사와 명성을 높여주는 유물은 단연코 고려초에 만들어진 8각13층석탑이었다.

그것은 보현사의 자랑일뿐만 아니라 북한에 남아 있는 석탑중 가장 빼어난 상징적 유물이다.

내 남이 모두 알고 있듯이 중국은 벽돌탑, 일본은 목조탑, 우리나라는 석탑의 나라다.

우리나라의 석탑은 백제 미륵사와 정림사에서 출발해 통일신라의 감은사와 불국사 석가탑에서 그 전형을 완성했다.

그것이 이른바 2층 기단의 3층석탑이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후삼국을 거쳐 고려시대로 넘어가게 됐을 때 석탑에는 각 지방 나름대로의 향토색을 띠게 됐다.

호족이 강해진 만큼 석탑에도 지방색이 반영된 것이다.

바로 그럴 시절 옛 고구려 지역에서는 이와 같은 8각석탑의 유행이 나타났다.

그 유행은 평양 영명사터의 8각탑을 거쳐 오대산 월정사의 8각9층탑까지 뻗쳤으니 고구려의 정서 반영권이 얼마나 넓은가를 짐작케 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이 왜 8각이었는가는 우리가 앞서 동명왕릉 정릉사에서 보았던 고구려 가람배치의 8각탑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 보현사 8각13층석탑은 바로 그런 역사적.지역적 특성을 띠면서 천년을 두고 우뚝한 것이다.

혹자는 말하기를 북한엔 석탑이 그리 많지 않다고 한다.

95%가 남한에 있다고 자랑삼아 말하기도 한다.

그 수치를 어떻게 가늠할까는 별도로 치고,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보현사 8각13층석탑 하나가 이곳 평안북도 향산군 향암리 묘향산중에 있다는 사실은 우리나라 석탑문화의 지도를 부여와 경주를 넘어 여기까지 그리게 하는 것이다.

그게 어디 작은 일일 수 있겠는가.

책으로 수없이 보아왔고, 해마다 한국미술사 시간이면 슬라이드로 비춰 보아왔던 이 보현사 8각13층석탑은 실물이 사진보다 훨씬 준수하게 잘 생겼다.

생각만큼이나 크고 세부의 묘사에도 게으름이 없고 마감질에 불성실은 커녕 추녀마다 풍경, 북한말로 바람방울을 무려 1백4개나 달아매는 치밀성을 보여주고 있다.

돌들은 이가 꼭 맞아 한치의 오차도 보이지 않는데 새로 고쳐 얹은 상륜부도 제법한 솜씨였다.

나는 탑돌이하는 신자인양 돌고 또 돌며 탑을 어루만져 보았다.

대웅전에 앉아 산자락을 배경으로 바라도 보고, 만세루에 올라 하늘을 배경으로 사진도 찍으면서 좀처럼 여길 떠나지 못했다.

그렇게 넋을 잃고 탑만 바라보고 있는데, 뜻밖에도 한 총각이 내게 다가와 "미안하지만 사진 좀 눌러주잡니까" 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내가 북한에 와 처음 대하는 민간인과의 만남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원하던 바인지라 사진 한방을 눌러주고는 요리조리 포즈를 다시 정비하게 해 놓고 또 한방을 찍어주며 정을 당겼다.

그들 일행은 나이든 부부와 한쌍의 남녀, 그리고 처녀 넷이었다.

나는 당연히 말을 걸었다.

"어디서 오셨습니까?" "평양에서 신혼여행 왔습니다."

"부모님하고 신부 친구들이 같이 왔습니다."

그러자 우리 답사를 도와주고 있던 조선아세아태평양평화위원회의 라운석씨가 북한에선 신혼여행을 곧잘 이런 식으로 온다는 보완설명을 해 주었다.

순간 나는 북한 사람들의 일상생활에 생각 밖의 측면이 있음을 골똘히 생각하느라 잠시 말을 잊었다.

그러고는 그 짧은 침묵이 부담스러워 신부 친구들에게 농을 걸었다.

"남의 신혼여행에 뭐하러 따라옵니까? 좋아서 왔습니까, 부러워서 왔습니까?" 그러나 처녀들은 부끄러움을 타는 듯 만세루 기둥 뒤로 돌아 숨으며 미소로 대답을 대신하는데 농담 잘하는 라운석씨가 한마디 했다.

"저런 걸 후천성 시집 매렴증이라고 합니다."

그러자 처녀들은 눈이 둥그레져 가지고 일제히 소리친다.

"이야, 놀림이 심하다."

그러곤 신혼부부 일행은 8각13층석탑으로 몰려가 맴을 돌면서 조금전 나처럼 석탑을 감상한다.

모두들 천진스런 손짓을 하며 뭐가 즐거운지 연신 웃음을 터뜨린다.

나는 저들의 저 청순한 살내음을 더 느끼고 싶어 자리를 일어나지 못했다.

신혼부부란 세상 어디를 가든 최상의 귀빈 대접을 받는 것이 인간이란 동물 사회의 본능적 규범인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 상념에 취해 있는데 라운석씨가 또 농을 건다.

"교수선생 그만 가자요. 교수선생처럼 처녀들에 취해 일어나지 못하는 사람을 북조선에서 애들이 장난으로 만든 말이 있습니다. "

"뭔데요?" "선천성 장가 고픔증이라고 합니다."

글 = 유홍준 (영남대교수.박물관장)

사진 = 김형수 (통일문화연구소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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