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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아라리 난장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0면

제2장 길위의 망아지 ⑭

식은 찌개그릇을 데우려 부엌으로 나갔던 승희가 방으로 들어왔다.

비로소 잠자코 있던 변씨가 승희를 잡아 먹을 듯 쏘아보며 물었다.

"이 여우 같은 년, 니가 이놈에게 서울 남편 주소를 가르쳐 줬지?" 걸레로 술상 가장자리를 가볍게 훔치던 승희는 지체없이 대꾸했다.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지요. 대단한 비밀도 아닌데, 알고 싶어서 몸살난 사람에게 굳이 못 가르쳐줄 일도 없잖아요. " 이번에는 박봉환이가 가파른 시선으로 변씨를 쏘아보았다.

승희가 어판장 주변에서 구멍식당이나 차리고 연명하고 있는 처지일 망정 거침없이 이년저년하는 것이 개운찮은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박봉환의 입에서 금방 험악한 한마디가 흘러나왔다. "이보소, 변씨요. 당신이 주문진 선착장에서 토박이 행세하는 것은 어쩔 도리가 없지만, 승희만 보았다 하면, 마루밑에 사는 똥개 부르듯이 걸핏하면, 이년저요년 하는데는 정말 치가 떨리네요. 나잇살이나 처먹은 주제라면 주디가 그렇게 험악해야 체면이 살겠습니껴?" 한바탕 북새통이 벌어지려는 찰나인데도 윤종갑은 두 사람의 아귀다툼을 잘코사니로 알아서 해식해식 웃고 있었다.

그 순간 한철규가 술상을 가볍게 치며 말했다.

"우리 모두가 신중하지 못해요. 대수롭지도 않은 감정다툼으로 이처럼 의미있는 자리를 난장판으로 만들어서는 안됩니다.

오늘밤 박봉환씨는 어떤 사람을 보복해준 것을 자랑삼아 떠벌리기 위해서 우리를 불렀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아직 해야할 말을 못 다한 것 같은데, 좀 조용하게 말을 들어본 다음에 멱살잡이를 해도 늦지 않아요. " 변씨의 입에서 튀어나오려던 걸레가 쑥 들어가고 말았다.

그로써 위기를 모면한 박봉환은 한풀이 죽어 소주잔을 만지작거리면서 목소리를 낮추었다.

"처음 그 자슥아를 찾아 갔을 때 작정은 봉변만 시키고 말려고 했는데…, 나를 남의 제사상에 뛰어든 개구리 같은 놈이라카면서 그 자슥아가 먼저 내 따구를 철썩 때립디더. 그렇게 되면, 일이 거꾸로 된 것 아입니껴. 애라 모르겠다 하고 주먹을 날리기 시작했는데, 나중에 정신 채리고 보이 사람 하나를 복날 개잡듯이 작신 두들겨 놨데요. 발로 건드려도 꿈쩍도 않길래 그때서야 겁이 덜컥 납디더. 그래서 싸움에는 삼십육계가 제일이라카는 말이 생각나길래 나도 그대로 했습니더. " "이젠 서울에서 맘 놓고 쏘다닐 수 없게 되었군. 그 사람 죽은 건 아닐까?" "죽다니요? 그런 엄청난 소리는 하지마이소. 나도 죽은 줄 알고 전화까지 걸어 봤거든요. 기집이 울고불고 지랄을 떨면서 씨부란스병원에 입원했다카대요. " "그건 어떻게 가르쳐 줬을까?" "내가 친구라고 둘러댔거든요. " "이 사람, 장차 큰 사고 저지를 사람이네?" 역시 윤종갑이가 떨리는 젓가락 끝으로 박봉환을 가리키면서 볼멘소리를 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조차 못 들은 척하고 있는 박봉환의 언행은 얼른 보기에 굼뜨고 어눌한 것 같으면서도 승희를 둘러싼 그들 세 사람의 각축을 속시원하게 잠재우고 벗어나려는 의지가 담겨 있었다.

그 패배를 맨 처음 인정하고 든 사람은 변씨였다.

윤씨는 패배를 애써 외면하려 들었지만, 변씨는 자신의 가슴 속에 끓어오르는 비장함을 사려가며 박봉환의 말을 경청하는 눈치였다.

한철규에게는 승희가 부담이 되고 승희편에서도 또한 그렇다는 것을 그동안의 관찰로 알아챈 결과였다.

저속하지만 박봉환이가 대신해준 앙갚음에 승희가 더할 나위 없는 위로를 받았고, 그것으로 두 사람 사이가 밀착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면, 세 사람 모두 입이 열 개씩이라도 따지고들 말은 마땅치 않았다.

<김주영 대하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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