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의 화가' 정명희 화풍 변신…죽어간 새들을 위하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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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강을 따라 하구로 아래로 내려가면서 물빛이 점점 흐려진다.

그리고 어느 시인이 말 한 것처럼 새들이 이 땅을 떠나는 모습이 보인다.

갈대밭 속에 나뒹굴어 있는 새들의 죽음이다.

먹어서는 안될 오물을 삼킨 채 죽어간 새들의 가여운 혼을 위해 금강의 화가 정명희 (鄭蓂熙.53) 는 최근 자신의 그림을 바꿨다.

지난 20년 동안 금강 자락을 따라 펼쳐지는 풍경을 그려온 자연예찬에서 구천을 헤매는 새들의 혼을 위해 영가천도 (靈駕薦度) 의 그림으로 바뀐 것이다.

갤러리 사비나 (02 - 736 - 4371)에서 28일까지 열리는 금강사랑전에서 정씨가 보여주는 그림은 새들이 떠난 뒤에 남은 허전함과 적막 그리고 탁해진 물 때문에 어쩌면 다음은 우리들일지 모른다는 절박함을 그린 것들이다.

물비늘이 반짝이는 수면 위로 낮게 날고 있는 검은 새 한 마리. 그리고 그 뒤에 배경으로 펼쳐져 있는 나트막한 산 그림자가 그림의 내용이다.

먼 곳을 향해 날고 있는 작고 검은 새는 끊임없이 삶과 죽음을 은유하고 있다.

정씨는 홍성에서 태어나 금강 자락을 밟고 살면서 보통의 한국화 작가처럼 한국의 산과 강을 놓고 그림의 이치를 깨치려 수없이 씨름해온 작가다.

그런데 근래 들어 스케치 나갈 때마다 눈에 밟히는 새들의 죽음이 차츰 보통이 아닌 것으로 다가오면서 거창한 산수화이론을 떠나게 됐다.

그리고 화사한 색채도 버렸다.

가슴을 메어오는 절박함을 놔두고 태연히 다른 무엇을 그리고 있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새들의 죽음에서 그는 생명의 무게를 다룰 새로운 테마를 찾은 것이다.

정씨의 이번 전시는 서울전에 이어 대구.부산.전주.광주.대전에 순회전시될 예정이다.

윤철규 미술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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