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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의 ‘충격 秘史’ ] 3선개헌 직전 ‘이만섭 폭탄발언’ 막후 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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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중앙 제3공화국 시절 정치적으로 가장 많은 적을 만들면서 가장 깊숙하게 영향력을 발휘했다고 할 수 있는 김형욱 중앙정보부장과 이후락 대통령비서실장을 물러나게 했던 이른바 ‘이만섭 폭탄발언’. “김형욱·이후락 저승사자가 있다”고도 했던 박정희 정권 시대의 최대 공화당 쿠데타 사건이 당시 이만섭 의원에 의해 40년만에 전모를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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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호텔 영빈관에서 열린 공화당 의원총회에서 ‘폭탄발언’을 하고 있는 이만섭 의원.

지난 3월25일,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 14층. 조용한 호텔 카페에서 오랜만에 만난 이만섭(76) 전 국회의장은 조금도 달라진 모습이 아니었다. 의장 시절 집무실에서 보았던 그 모습 그대로 여전히 살이 붙은 곳은 양쪽의 두툼한 귓밥밖에 없다고 할 정도로 불필요한 체중은 털어낸 건강체였다.

유럽의 고풍스러운 가옥 내부를 꾸며놓은 듯한 실내 분위기 때문에 개인사무실이 없는 전직 고위인사들이 자주 이용하는 이곳 카페에서 본지 사진부 이찬원 기자가 이 의장을 향해 연거푸 플래시를 터뜨리며 촬영하자 젊은 카페 마담이 황급히 다가와 “여기서는 안돼요. 사진 촬영이 금지돼 있어요”라고 했다.

엷은 미소를 머금은 마담이 양해를 구하는 셈이었다. 이 의장은 손님들에게 피해를 줄까 싶어 별도의 공간으로 이동해 자리 잡았는데도 마담이 사진을 못 찍게 하자 “괜찮아, 잠깐이면 돼”라며 카메라를 막지 말라고 손짓했다.

그래도 마담이 낭패스러운 얼굴로 “여기서는 사진을 못 찍게 하는데…”하면서 이찬원 차장에게 눈빛을 돌리자 이를 바라보던 이 의장한테서 반사적으로 ‘오리지널 이만섭’이 나타났다. “괜찮다니까! 내가 찍으라면 찍는 거지. 총지배인 어디 있어? 전화 대봐.” 짙은 눈썹을 위로 치켜 올리며 마치 음식 씹듯 짓눌린 금속성 목소리를 토해내면, 그것이 권위를 지킬 때 보여주는 오리지널 이만섭이다.

남들은 30년 넘도록 국회 본회의장을 들락거려봐야 국회부의장은커녕 상임위원장 자리 한번 차지하기 힘들다고 하는데 14대와 16대, 두 번의 국회의장을 지내고 8선의 관록을 지니고 있으니 별도의 권위를 설명한다는 것이 오히려 거추장스러울지 모른다. 더구나 이 의장한테서 나오는 권위는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권위주의와 다르다.

“한번 이야기하면 알아들어야지. 사적인 자리도 아니고 언론사와 인터뷰하고 있는 걸 보면서 말이야….”

이 한마디가 이 의장의 공적 자세를 설명해주는 것이 된다. 언뜻 박 대통령의 모습이 연상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인터뷰가 시작됐다. 늘 그래왔던 것처럼 이 의장에게는 긴 질문이 필요하지 않았다. 왜 만나자고 하는지 알고 나오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워낙 노련해 언론이 궁금해하는 것 이상을 준비해 “요건 제목으로 뽑아도 될 거야” 할 정도로 냅다 웃으며 분위기까지 휘어잡는 것이다.

-요즘 근황은 어떻습니까? 지난 3월12일 청와대에서 열린 원로회의 때도 참석하셨지요?
“참석해서 잘 하시라고 했지, 뭐. 신문에 다 났잖아? 요즘 나는 주로 대학에 특강하러 다녀요. 인터뷰는 이 선생이 오랜 동지이니 응해준 거고. 하하하….

대학에서 특강 주제는 주로 ‘한국정치의 선진화’인데, 최근에는 대통령이 어떻게 해야 이 나라가 잘되나, 그런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이명박 대통령이 집권 2년째 들어가지 않았어요? 역대 대통령을 보면 2년째가 가장 중요하거든? 왜, 1년을 넘기면 자신이 생겨 오만과 독선에 빠지기 쉬워요.

그래서 이 대통령도 올해가 중요한데, 역대 정권에서는 테마가 다 있었어. 박 대통령은 경제를 재건해야 한다, 전 대통령은 군사정권 이미지를 씻어야 한다, 그래서 물가도 잡고 깡패들 다 잡아넣고…. 노 대통령은 북방외교를 해야 한다,

YS는 민주화 정착하고 실명화와 군사문화 제거한다, DJ는 남북문제 풀어야 한다, 노무현 대통령은 양극화를 해소한다, 뭐 그런 테마가 정권마다 다 있었단 말이야. 그런데 MB정권은 경제를 회복시켜야 하는 아주 힘든 과제와 싸우는 중이라는 말이에요. 이건 우리 한국만 잘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서 그전 정권이 잡은 테마보다 훨씬 어렵고 통치자로서 보통 어려운 숙제를 떠안은 게 아니야.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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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공화국 시대를 주무르다시피 했던 정치권력의 대표적 거물 김형욱 정보부장(왼쪽)과 이후락 대통령비서실장이 한가롭게 삼청동길을 내려오고 있다.

-길이 있습니까?
“굉장히 어렵지만 대통령이 무엇보다 두 가지 정치를 잘해야 해요. 하나는 국민을 향해 ‘믿음의 정치’를 보여줘야 해. 내가 약속하는 것은 절대 지킨다, 정책은 일관성 있게 결코 바뀌거나 흔들리지 않는다, 그런 믿음을 줘야 해요.

또 하나는 대통령 자신을 향한 정치를 할 수 있어야 해. 이게 무슨 말이냐? 여야를 향해 하는 정치가 아니라 대통령이 자신을 향해 하는 정치예요. 그게 화합과 관용의 정치야. 사실 참 어려운 건데, 반대파들까지 포용해야 해요. 국민 중에도 반대파가 있지만, 집권당에 웬 파가 그리 많아?

그걸 전부 없앨 수 있는 사람은 이 대통령 자신밖에 없어요. 물리적으로 없애는 것이 아니야. 이 대통령이 화합과 관용의 그릇 속에 전부 끌어 담는 거야. 그게 자신을 향한 정치예요. 그게 되면 2년차부터는 모든 것이 잘될 수 있어요. 내가 그런 내용을 특강하고 있다고. 특강료를 대통령한테 받아야 하는데. 하하하….”

-정치는 타이밍도 중요하지 않습니까?
“그게 프로지. 진짜 프로급 지도자는 타이밍을 절대 놓치지 않고 아마추어들이 짚어내지 못하는 절묘한 타이밍을 잡아내는 거야. 그런 데서 국민의 환호가 터지는 거예요. 해야 할 때를 놓치면 아무리 좋은 정책도 헛일이 되잖아? 너무 앞서도 엉망이 되고. 그만큼 정치는 타이밍이 중요한데, 요즘도 그런 일이 하나 있잖아?”

-국회에서 말입니까?
“에이~ 국회는 무슨. 이 대통령이 사회에 내놓겠다던 재산, 왜 여태 안 나오지? 나와야 어떤 재산들인지 얼굴이라도 볼 텐데, 자꾸 연구 중이라고만 하고 안 나오니 이상한 쪽으로 여론이 돌고 있던데 말이야. 1년이 넘었잖아요? 연구하는 기간이 뭐 그리 걸릴 것이 있어? 보건복지가족부도 있는데 거기다 줘서 알아서 하라고 하든가,

줄 곳이 없으면 나한테 주든가. 하하하…. 이 말은 빼야겠다. 오해할라. 나한테 맡겨봐야 관리 못하니까. 바로 그런 타이밍이 중요한 거예요. 시간이 지나면 국민도 관심이 변해요. 집 한 채만 남기고, 이게 전부라고 내놔도 국민은 숨기느라 시간이 걸렸나? 3분의 1이나 내놨나? 이렇게 된다는 말이야. 그래서 타이밍이 아주 중요한 거야. 비단 그런 문제뿐 아니라 정치는 타이밍을 놓치면 신뢰까지 잃게 되기 때문에 참 중요한 거예요.”

-의장님은 왜 계보가 없습니까?
“계보를 두자면 재벌들한테 손을 벌려야 할 거 아니에요? 정치자금 없이 보스가 될 수 있어요? 그래서 나는 계보가 없어. 그러니까 돈도 없고 계보도 없는 거지. 계보 없더라도 존경받는 정치인으로 남는 게 더 가치 있고 훌륭한 거지,

뭐. 그러고 단 한 사람이라도 재벌한테 큰소리 칠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할 거 아니에요? 그게 이만섭이잖아. 그러다 보니 나는 계보정치를 아예 생각 안 한 거예요. 그렇지만 나를 존경하고 좋아하는 국회의원은 많아!”

-누가 있습니까?
“전부 다야! 하하하…. 여야 할 것 없이 많지. 17대 때는 더 많았지만 현역만 해도 박종근·김성조·정의화·원유철·김성순·이용삼·김충조·박주선·김부겸·전재희…. 더 말해? (그 사람들이 의장님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 의장님이 그 사람들을 좋아하고 사랑했던 거 아니냐고 되묻자)국회에 짝사랑이 어디 있어! 서로 좋아하는 거지.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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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섭 전 국회의장.

이 의장은 오랜만에 만나서인지 ‘이후락·김형욱의 저승사자’에 대한 인터뷰 테마는 뒤로 미뤄놓고 최근의 관심사가 된 현안들에 대해 볼륨의 크기를 가리지 않고 주저 없이 자신의 생각을 피력했다. 그런 중에 개성공단 근무자 억류문제도 나왔다.

“내가 지난번 청와대에서 원로회의를 할 때도 북한이 경제적 어려움은 말할 수 없이 참혹하면서 정치적으로 자꾸 문제를 일으키고 어떡하면 미국까지 건드려 실리를 챙기나 그런 전술을 계속 쓰는데, 우리 정부는 흔들림 없이 외교력을 발휘해 신중히 대처해야 한다고 주문했지만, 개성공단 문제도 나는 처음부터 잘못된 거라고 봤어요. DJ정권 때 시작해서 노무현 정권 때 문을 열었지만 그걸(개성공단) 경제적 문제로만 생각했어야 하는데 정치적 문제까지 포함해서 접근했다는 말이야. 그래서 나는 개성공단 만드는 것을 반대했어요. 아직은 아니다, 좀 더 신중해야 한다고 말이지. 근데 성급하게 가더라고. 그럼 언제 해야 하느냐? 공단 같은 것은 남북이 서로 믿을 수 있는 단계가 됐을 때 해야 하는 거예요. 신뢰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하니 우리 국민이 인질처럼 잡혀도 속수무책 아니야? 그러니까 지금이라도 반드시 원칙대로 가야 해요. 북한이 자꾸 정치적으로 개성공단까지 이용하고 있는데, 우리 정부는 경제교류라는 원칙을 확고하게 하고 그걸 북한이 깨닫도록 해줘야 한다는 말이야. 미래의 남북관계를 긍정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해서도 이건 아주 중요해요.”

에서 이어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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