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문화유산답사기]4.동명왕릉…노송숲속 '당당한 고구려'자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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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이번 북한 문화유산 답사길에 나는 최상의 안내자를 만났다.

우리를 초청한 조선아세아태평양평화위원회측은 중앙력사박물관 리정남 (李定男.48) 연구사를 문화유산 전문가로 전기간 동행하도록 주선해 주었다.

리선생은 외모부터 조용한 선비풍인데, 말수도 적고 몸가짐도 차분하며 성격도 꼼꼼했다.

한마디로 나와는 정반대 되는 성품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오히려 금방 친해지게 됐다.

본래 어려서는 성격이 비슷해야 친구가 되지만 나이들어 만날 때는 달라야 마찰도 없고 마음이 편한 법이다.

리선생은 학문태도 또한 치밀한 연구자의 면모가 있어 유물의 제작연도는 물론 날짜와 숫자 및 크기까지 다 외고 있었다.

더욱이 그는 50년만에 남한에서 찾아온 이방인 아닌 이방인을 위해 문화유산에 대한 남한측 학술용어를 모두 알아두고 있었다.

나또한 북한을 방문하기 앞서 북한의 고고미술사 용어를 많이 익혔다.

그리고 현지에서 말할 때면 되도록 그쪽 용어를 쓰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나와 리선생이 대화할 때면 나는 북한용어로 묻고 그는 남한용어로 대답하는 진기한 현상이 일어나곤 했다.

평양에 도착해 3일째 되는 날 우리의 답사일정은 동명왕릉과 진파리 (眞坡里) 고분떼, 그리고 동명왕릉을 위해 지은 절인 정릉사 (定陵寺) 로 잡혀 있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묵고 있는 초대소 별채 현관에 출발자들이 집결하는데, 여가를 틈타 답사자료를 확인하고자 리선생에게 물었다.

“리선생, 진파리 무덤들은 내부구조가 대개 돌칸흙무덤이죠?”

“네. 그렇습니다. 석실봉토분 (石室封土墳) 입니다.” 평양시내를 벗어나 평양~원산간 고속도로를 올라타니 중화들판을 가로질러 곧게 뻗은 도로에는 눈앞에 거칠 것이 없다.

차창 밖으로는 들판너머 산자락 아래로 농가들이 머리를 맞대고 정겨운 마을을 이루고 있는 것이 50년대 활동사진 장면처럼 스쳐간다.

그렇게 10여분쯤 달렸을 때 도로 한쪽으로 '동명왕릉 3㎞' 라는 이정표가 나왔고 우리는 이내 동명왕릉에 도착했다.

동명왕릉은 평양시 외곽, 력포구역 룡산리 재령산 서쪽 가지줄기의 구릉 위에 있다.

옛날에는 여기가 평남 중화군 (中和郡) 진파리였기에 진파리 고분군으로 알려진 무덤 중 하나인 것이다.

동명왕릉은 내가 그동안 사진으로 보아온 것과는 엄청나게 달랐다.

대대적인 복원작업으로 능문 (陵門) , 석등, 문관.무관상, 제당 (祭堂) , 돌범 등이 거하게 배치돼 있다.

설명이 없어도 조선시대 왕릉을 고구려식으로 재해석한 20세기 유적인 것을 알겠다.

나는 리선생에게 물었다.

“언제 이렇게 복원했습니까?”

“1993년 5월14일에 개건 (改建) 했습니다.” “어떻게 날짜까지 다 기억하십니까?”

“아, 그날이 동명왕의 2천2백95회 생신날입니다.

왕의 생일이 음력 4월1일인 것을 톺아 (거슬러) 올라가서 양력으로 찾아낸 것이죠.” 북한에서는 고구려의 건국연대를 '삼국사기' 에 나오는 기원전 37년보다 2백40년 앞선 기원전 277년으로 보고 있다.

잔디가 곱게 깔린 언덕 자락에 고즈넉이 자리잡고 있으리라고 상상했던 동명왕릉이 이처럼 거대한 영웅기념물로 바뀐 것을 보고 있자니 남쪽에서 아산 현충사라는 거창한 유적을 볼 때 일어난 감정과 똑같은 심사가 일어났다.

나는 시선을 건너 뛰어 동명왕릉을 살폈다.

동명왕릉은 역시 시조의 능다운 위용과 고구려 고분다운 힘이 있었다.

선입견이 아니더라도 부여 능산리의 아담한 고분, 경주 서악동의 화려한 고분과는 달리 굳세 보였다.

특히 동명왕릉은 고구려의 대표적인 세 가지 무덤 형식이 모두 갖춰져 있다.

본래 퉁거우 (通溝) 지안 (集安)에 있던 왕릉을 평양으로 천도하면서 옮겨왔기 때문에 퉁거우의 돌각담무덤 (積石塚) 과 평양의 돌칸흙무덤 형식이 복합됐다.

그리고 내부엔 벽화까지 있는 벽화무덤이다.

그래서 동명왕릉의 외형을 보면 돌각담무덤식으로 3단의 정방형 돌축대를 쌓고 그 위에 봉분을 만들었다.

그런데 기단의 한변 길이가 31m이고 봉분의 높이는 11.5m이니 규모가 대단하다고 아니할 수 없다.

단조로운 구성으로 별 치장이 있을 수 없는 무덤무지같지만 축대를 쌓은 것을 보면 돌 윗면에 턱을 주어 윗돌이 밀려나지 않게 했고, 위쪽으로 각도를 조금씩 좁혀 쌓아 튼튼하고 강인해 보인다.

거기에다 봉분이 그냥 둥근 게 아니라 네모뿔로 올라가는 직선의 맛이 있고, 그냥 직선이 아니라 정상에서 둥글게 마무리됐으며, 여기에다 왕릉다운 권위를 위함인지 무덤무지 사방으로 5m폭의 강자갈을 깔아 기품이 더욱 살아난다.

한마디로 고구려 맛이 나게 축조됐다.

1970년대 초 동명왕릉은 내부구조가 다시 조사됐다.

이때 벽면을 덮고 있던 석회를 씻어내리면서 벽화가 발견됐다.

벽화는 지름 12㎝의 연꽃무늬를 4.2㎝간격으로 해 사방연속무늬로 무려 6백여개를 덮은 것으로 발굴보고서는 전하고 있다. 무늬의 바탕은 보라색이고 연꽃은 붉은 자색이었다고 한다.

얼마나 고왔을까. 나는 리선생에게 물어보았다.

“동명왕릉 벽화가 언제 발견됐죠?” “1974년 1월23일이지요. 제가 김일성 (金日成) 대학 졸업하고 맨 먼저 발굴에 참가한 것이 여기였습니다.

그때 우리가 연꽃 그림 1백4개를 찾아냈지요. 그래서 이것을 사도지 (트래싱지)에 옮겨 그리고 사귐점 (모서리) 마다 연꽃을 복원해 보니 6백41개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보람 있었습니다.” 나는 리선생의 발굴 얘기를 들으면서 왕릉의 모습을 꼼꼼히 살펴 보았다.

그런데 아무리 보아도 그동안 사진으로 보아온 봉분보다 많이 큰 것 같아 리선생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는데 대답은 예상 밖으로 간명했다.

“봉분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많이 큽니다.”

“네, 맞습니다.복원하기 전에는 높이가 8.5m밖에 안됐단 말입니다. 그런데 '위대한 수령님' 께서 1천5백년 동안 비바람에 깎여 이만한 크기로 된 것이니 본래 크기는 얼마만한 것이었나 계산하라고 교시하셨습니다.

그래서 학자분들이 과학적으로 계산해낸 결과 11.5m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내 생각에 동명왕릉에 기품과 권위를 부여해 준 것은 이곳 진파리 언덕의 솔밭이었다.

동명왕릉 주위로는 해묵은 노송이 숲을 이루고 있다.

안내원 설명으로는 모두 1천6백그루이고 수령은 4백~5백년이란다.

게다가 왕릉을 둘러싼 소나무들은 햇볕을 조금이라도 더 받으려고 가지를 왕릉 쪽으로 시원스레 뻗치고는 줄기조차 기울이고 있으니 마치 군신이 왕에게 읍 (揖) 하는 형상이다.

답사를 다니면서 나는 아름다운 솔밭을 참 많이 보았다.

경주 남산의 삼릉계, 청도 운문사 계곡, 풍기 소수서원의 진입로, 밀양 낙동강변의 긴 늪숲, 평해 월송정의 해송밭, 봉화 반야계곡의 춘양목 자생지, 영월의 장릉 솔밭…. 내 아직 백두산 홍송 천연림은 못 보았지만 진파리 솔밭은 그 어디에 뒤질 것 없는 연륜과 넓이와 품격을 갖추고 있다.

그것은 동명왕릉 못지 않은 거대한 유산이었다.

글 = 유홍준 〈영남대 교수·박물관장〉

사진 = 김형수〈통일문화연구소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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