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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록이 아빠의 바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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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 조선시대 성리학의 최고봉이라 할 거유(巨儒) 퇴계는 장남 준(寯)에게 무려 321통의 편지를 남겼다. 장남 준이 18세 때부터 48세가 되도록, 그리고 자신이 일흔 나이에 숨을 거둘 때까지 쉼 없이 당부하고 질타한 것이다. 1542년 어느 날, 아들 준에게 보낸 편지에서 퇴계는 이렇게까지 일갈했다. “끝내 농부나 병졸이 되어 일생을 보내려 한단 말이냐?” 결국 퇴계의 기대만큼 자식이 크지는 못한 것 같다. 천하의 퇴계 역시 자식은 맘처럼 안 되었던 것이다.

# 역설적인 이야기이지만, 아버지의 그늘이 너무 크면 되레 자식이 크기가 쉽지 않다. 큰 나무 밑에서 다른 나무들이 제대로 자라지 못하는 이치와 같은 것이다. 그래서일까. 장 폴 사르트르는 “아버지가 아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은 일찍 죽는 것”이라고까지 말했다. 끔찍하게 들리는 말이지만 일면 진실이 담겼다. 실제로 아버지의 과도한 간섭과 계도가 자칫 아이의 창의와 상상, 그리고 가능성을 가로막는 일들이 허다하다. 그래서 아이를 진짜로 크게 키우려면 어느 정도는 방목(放牧)과 내버려둠이 필요하다.

# 미국영재교육협회장을 지낸 빅터 고어츨과 밀드레드 고어츨 부부가 세계적 인물 400명의 성장과정을 분석한 후 내린 결론 중 하나는 아버지의 파산이나 경력상의 실패가 자녀의 성공과 성취엔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세계적 인물들의 아버지 중 4분의 1은 인생의 실패자였다.

# 9·11 테러 당시 뉴욕시장이었던 루돌프 줄리아니의 아버지는 무명의 복서였다. 그는 매맞아 번 돈으로 줄리아니를 가르쳤다. 그는 자신의 고단했던 삶에서 몸으로 터득한 절절한 한마디만을 아들 줄리아니에게 물려줬을 뿐이다. “얻어맞을수록 침착하라”는 한마디였다. 하지만 이 한마디가 9·11 테러 당시 줄리아니의 정신적 기둥이 될 줄 누가 알았으랴. 줄리아니는 아버지가 남긴 그 한마디 덕분에 침착성을 잃지 않은 채 사태를 조기에 수습할 수 있었다. 줄리아니의 아버지는 흔히 말하는 세속적 기준에서는 실패한 아버지였다. 하지만 그 실패한 아버지의 한마디가 아들의 극적인 성공을 만들었다는 역설 앞에서 우리는 겸허해지지 않을 수 없다.

# 사람이 큰다는 것은 단련받으며 부닥친 난관을 뚫어낸다는 뜻이다. 그러니 아이들이 넘어졌거든 곧장 일으켜 주지 마라. 그냥 내버려 두라. 자기 안의 숨은 힘을 끌어낼 때까지. 물론 자식이 실패하길 바랄 부모는 없다. 하지만 그 아이의 실패와 좌절마저도 그 자신이 가야 할 길 위에 놓인 단련의 이정표일 뿐이라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고 좀 더 인내심 있게 지켜보는 자세가 세상의 부모들에게는 너무나 필요하다.

# 5월이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새삼 떠올리게 만드는 달이다. 하록이 아빠의 바람이 담긴 이름처럼 하록이가 자라기를 바란다. 저마다 아이들의 이름은 달라도 세상의 모든 아버지는 자식들이 단련 속에서 제대로 커 주길 바란다. 아울러 이 오월의 하루쯤, 아버지들이여 아이들에게 편지를 써 보자. e-메일도 좋다. 너무 가르치려 들지 말고 자기 삶이 녹아 있는 한마디를 전해 보자. 언젠가는 그 한마디가 자식의 운명을 바꿀지 모른다.

정진홍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