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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문화유산답사기]3.보통문…戰禍도 비켜간 '평양의 神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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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서울이 현대도시로 바뀌는 과정에서 오직 남대문과 동대문이 남아 있어 옛 한양성의 자취를 엿보게 하듯이, 평양에는 대동문 (大同門) 과 보통문 (普通門) 이 그 옛날의 평양성을 지키고 있다.

옛글에 따르면 남쪽에서 오는 이는 대동문을 거쳐 보통문으로 나가고, 서쪽에서 올라오는 이는 보통문을 지나 대동문에 이른다고 했다.

둘 다 평양성의 정문이다.

그런데 대동문이 대동강변에 있듯이 보통문은 보통강변에 있다.

평양은 이처럼 강으로 둘러싸인 도시다.

그래서 평양은 풍수지리적으로 말해 배모양을 하고 있다고 한다.

이사벨라 비숍은 대동강물을 연방 길어 올리는 물장수를 보면서 왜 우물을 파지 않고 강물을 길어 먹는지 이상했단다.

그래서 알아본즉, 평양은 배모양이므로 우물을 파면 배가 가라앉게 돼 나라에서 금지시켰다는 얘기를 듣고는 그 미신의 위력이 놀랍고도 한심스러웠다고 통탄했다.

그러나 풍수가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평양과 같은 퇴적암의 지세에서는 물에 장기 (장氣 : 축축하고 더운 땅에서 생기는 독기)가 있어 식용수로 부적합하기 때문이라고도 하고, 혹자는 수만 가구가 우물을 팔 경우 지반에 문제가 생길 수 있기 때문에 막은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어느 이유든 옛 조상들이 한 일인데 어련히 잘 알아서 했을라고. 평양도 한 시대, 한 나라의 수도였는데 그곳의 군사적.정치적.생활적 측면이 왜 고려되지 않았겠고, 그 지세의 여러 허점을 또 여러 방법으로 보완하지 않았겠는가.

그 보완책의 하나가 성 (城) 의 배치였다.

평양이 천연의 요새이긴 했지만 그 방위의 기본이 강줄기고 산이 아닌지라 이를 보강함이 평양성의 기본계획이 됐음은 설명 없이도 짐작할 수 있는데, 실제로 고구려 시대부터 평양성은 내성 (內城).외성 (外城).중성 (中城).북성 (北城) 등 겹겹이 4개의 성으로 둘러싸였다.

북성은 군대가 주둔하고, 내성은 관아가 들어있었고, 중성.외성엔 민가가 자리잡았는데 그 중성의 서쪽 대문이 보통문인 것이다.

보통문은 이처럼 산과 강이 마주 보는 자리에 있어 그 주변 풍광이 참으로 곱다.

그래서 일찍이 평양 8경의 하나로 꼽혀 왔다.

보통문은 예로부터 신문 (神門) 이라고 불렸다.

임진왜란 중 평양성 탈환작전 때 불화살 (火箭) 이문에 어지러울 정도로 날아들었으나 끝내 불에 타지 않았으니 사람들이 그때부터 귀신 같은 문이라고 부르게 됐다는 것이다.

그것 또한 지세 덕이었는가, 보통문의 사주팔자였던가.

그로부터 3백50년 뒤 6.25동란 때 평양은 폭격을 심하게 당해 전쟁이 끝났을 때 시내에 온전한 건물이 딱 두채 뿐이었다고 하는데, 그 하나는 은행건물이고 또 하나는 이 보통문이었단다.

신문은 신문인 셈이다.

6.25동란 뒤 1960년대초, 평양시에 새로운 거리를 설계하면서 보통문은 평양 구시가와 서쪽의 신시가를 잇는 중심에 놓이게 됐다.

보통문을 로터리 정원으로 해 천리마거리.창광거리.보통문거리를 동.남.북으로 곧게 내고, 보통문이 마주 보고 있는 보통강엔 보통교를 놓았다.

나는 보통문에 당도했을 때 반가움에 들떠 길을 뛰어 건너다 교통안내원에게 제지당했다.

평양에선 길을 건널 때 뛰지 못하게 돼 있다는 것이다.

남쪽에서 왔기 때문에 봐줬지만 본래는 서너시간 교육을 받아야 했단다.

로터리 한가운데 모셔 있는 보통문으로 들어서니 돌축대가 완전하다.

돌마다 이가 꼭 맞아 빈틈이 없는데 담쟁이덩굴이 잘 자라 그 운치와 조화로움이 더하다.

더욱이 보통문의 축대는 수평을 맞춰 쌓아 올린 것이 아니라 돌마다 층을 달리 해 마치 조각보를 잇듯이, 또는 몬드리안의 기하학적 구성을 보여주듯 아주 조화로운 변화를 이루고 있다.

이는 사실상 아름다움을 위해서가 아니라 돌축대의 견고성을 위해서였다.

돌마다 이를 얼기설기 엇물려 지진에도 미끄러나는 일이 없게 한 것이다.

북한식 표현으로 '억세기를 높인 것' 이다.

안내원의 허락을 얻어 문루로 올라 사방을 살펴보니 모든 길이 보통문을 향해 달려오는 것만 같다.

창광거리고, 천리마거리고 시내엔 오가는 자동차가 드문데, 무궤도전차는 제법 바삐 보통문을 휘감고 돈다.

나는 누마루에 걸터앉아 보통강을 내려다보았다.

강상엔 큰 다리가 놓여 강물이 눈에 들어오지 않건만 다리 건너 곧게 뻗은 길 끝엔 높이 1백5층의 세모뿔형 미완성 고층건물인 유경 (柳京) 호텔이 버티고 서 있다.

뒤로 돌아보니 거기 장문의 현판이 하나 걸려 있다.

뜻밖에도 채제공 (蔡濟恭) 이 쓴 '보통문 중건기' 였다.

정조때 가장 유능한 재상으로 이름 높았던 채제공이 50세때 평안감사가 돼 이 보통문을 고치고 낙성할 때 써 붙인 현판인데 그 뜻이 참으로 크고 아름다웠다.

"서경 (西京) 은 대도시다.

그 문에 대동문과 보통문이 있다.

…모란봉이 멀리 아득히 곱게 단장하고 평양의 진산 (鎭山) 을 이루었는데 거기서 한 줄기를 뻗어내려 구불구불 활 윗시위 모양으로 3, 4리쯤 내려가 보통강을 만나면 그친다.

그리하여 산맥과 강물이 마치 서로 머리를 맞대고 남몰래 무언가 주고 받는 듯하다.

그래서 얼른 보아서는 그 순맥 (順脈) 과 역수 (逆水) 의 방향이 다름을 알지 못한다.

바로 그 산과 물이 만나는 자리에 보통문이 있다.

……" 도도한 물결처럼 흘러가는 채제공의 문장은 그의 인품 만큼이나 청아 (淸雅) 하고 진중하다.

글은 또 이어가기를, 평양사람들이 보통문을 중수하는 것이 하나의 숙원이기에 나랏돈을 내고 민력 (民力) 은 한 사람도 빌리지 않고 일꾼을 사서 고쳐 놓으니 "버드나무 그늘과 소나무 사이로 단청빛이 더욱 새롭고 고와 보였다" 는 것이다.

그래서 서경사람들이 모두 즐거워하고 있는데 이때를 맞아 채제공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지금 평양에서 고쳐야 할 것은 이 보통문만이 아니다.

나라 곳간이 텅 빈 재정의 고갈은 문의 기둥이 썩어간 것과 무엇이 다르며, 백성들이 가렴주구로 시달리는 것은 서까래 네 구석이 무너져내리는 형세와 무엇이 다르며, 풍속이 퇴폐해 날로 낮은 데로 흘러감은 기와가 땅에 떨어지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물건이 허물어진 것은 혹은 기다려 고치면 되겠지만 백성의 삶이 허물어진 것은 장차 어디에 기대해야 할 것인가.

나는 이 말을 여기에 기록해 두어 내가 근본을 버리고 그 말엽만 힘쓴 것을 부끄러워했음을 알게 하고자 하노라. " 이런 글을 일러 명문이라 하는 것이리라. 아!

채제공이여! 그 높은 도덕과 경륜이여! 나는 지금 이 보통문 누각에 앉아 또 그 무슨 한갓된 아름다움만 말하는 말엽에 빠졌던 것인가.

생각하자니 부끄러움, 부끄러움 뿐인데 보통강 저 너머 붉은 해가 홍채를 뿌린 저녁 노을에 나의 얼굴은 자꾸 붉어만진다.

글 = 유홍준 (영남대 교수.박물관장)

사진 = 김형수 (통일문화연구소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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