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굴투혼 고려증권의 배구선수들…소속기업 비운에도 슈퍼리그 놀라운 성적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7면

문제는 돈이다.

우리는 '세종대왕' 의 얼굴을 더 많이 접하기 위해 발버둥친다.

돈은 곧 힘 아닌가.

요즘 '조지 워싱턴' 과 '에이브러햄 링컨' 이 우리의 목줄을 쥐고 좌지우지하는 것도 그 탓이리라. 이러한 돈의 논리는 스포츠계에도 여지없이 적용된다.

풍족한 팀은 '이미 스타' 를 거액을 들여 데려오지만 그렇지 않은 쪽은 '아직 무명' 으로 팀을 끌고갈 수밖에. 결과는 뻔하다.

대개 스타네의 승리로 끝나게 마련. 너무 통속적인 것 아닌가.

그런 의미에서 요즘 배구는 재미있다.

소속기업의 부도 상황에서도 놀라운 성적을 거두고 있는 고려증권이 통속성을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슈퍼리그 1차대회 2위라는 호성적은 믿어지지 않을 정도다.

2차대회에서도 쾌조의 출발을 보였건만 진준택 (49) 감독의 굳은 표정은 좀처럼 풀리지 않는다.

본래 무뚝뚝한 성격의 그지만 말수도 더 줄었다.

“일단 큰 고비를 넘기긴 했지만 어려운 점이 한두가지가 아닙니다.”

우선 전력이 불안하다.

상무로 간 레프트 주공격수 이수동 (27) 의 공백, 라이벌 팀에 비해 취약한 블로킹, 엷은 선수층 등. 재정적 어려움도 만만치 않다.

이는 선수들의 대구 숙소가 '수성호텔' 대신 '송림장' 으로 바뀐 데서도 드러난다.

하지만 진감독이 느끼는 진짜 어려움은 다른 데 있다.

“만에 하나 팀이 해체돼 선수들이 뿔뿔이 흩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 잠도 안 옵니다.”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언제건 사기를 떨어뜨릴 수 있다는 것이다.

자연 이런 상황에서 '괴력' 을 발휘하고 있는 고려증권 배구단의 비결이 궁금해진다.

아무리 이 대회서 6회의 우승을 차지한 명문구단이라 하더라도 지금은 견디기 힘든 상황일텐데…. 우선 진감독의 지도력이다.

주장 박삼룡 (30) 선수의 말. “처음 부도소식을 접했을 때는 모두 당황했습니다.

연습할 의욕도 나지 않았고요. 그때 감독님이 '나만 믿으라' 며 우리를 일으켜 세웠죠.” 벼랑끝에 몰린 선수들의 투혼도 한몫을 했다.

라이트 공격수 문병택 (27) 선수의 이야기. “1차대회 첫 경기서 LG화재와 맞붙었습니다.

첫 세트를 잃고 나니 이대로 주저앉을 수 없다는 오기가 꿈틀하더군요. 동료의 눈빛도 비슷했죠.” 결과는 역전승. 내친 김에 '우승까지 해보자' 는 각오를 다졌다.

날이 갈수록 커지는 각계의 성원도 무시할 수 없다.

특히 고려증권의 전.현직 사원 50여명은 매경기 목이 터져라 응원을 하고 있다.

게다가 없는 형편에도 성금을 모아 전달하기까지 하니 선수단의 사기가 높아질 수밖에. 여기다가 일반 관중들의 응원하며…. 그러나 무엇보다 '고려파워' 의 비결은 조직력과 기본기다.

진감독은 “스카우트 때도 스타로 불리는 선수와는 아예 접촉을 안해요. 대신 평소 성실한 선수를 눈여겨 봤다가 데려옵니다.”

개인기보다는 아기자기한 팀플레이를 강점으로 하는 고려증권이다 보니 자기 몫을 다하는 그만그만한 선수들로도 강한 전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얘기다.

신인 세터 엄종식 (23) 선수는 “처음 체육관에 나가선 당황했어요. 최고참부터 열심히 훈련중이더군요. 당연히 저도 기본기부터 다시 점검을 하며 기량을 익혔죠” 라고 말한다.

문제는 돈이 아니다.

혹시 우리가 유례없는 'IMF한파' 를 맞이하게 된 것도 돈보다 중요한 무언가를 잊고 있었기 때문 아닐까. 고려증권팀에 보내는 우리의 성원도 그들이 몸짓으로 통속적이지 않은 진실을 일깨워주고 있는 것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인지도 모른다.

대구 = 문석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