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호 세상보기]아무도 빚지고는 못산다(2)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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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새해 복 많이 받으라는 신년인사가 황당하게 들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역시 빚이 문제인 것 같다.

우리 가슴을 납덩이처럼 누르는 이 빚덩이가 바로 액물인 것이다.

은행과 기업이 외국에 진 빚 1천5백30억달러, 대기업이 서로 보증서준 채무 33조원, 우리 집이 은행에서 빌린 돈 25조원, 그리고 내가 카드로 긁은 돈 80조원 등등. 차라리 인생은 빚이라고 말하는 게 어울릴 것 같다.

어쩌다 이렇게 사방이 빚투성이로 둘러싸이게 됐을까. 그리고 빚을 갚기는 왜 이렇게 어렵단 말인가 (빚더미에 빠져드는 것은 반나절, 빠져 나오는 데는 이틀) . 97년 8월2일자 세상보기 '아무도 빚지고는 못산다' 에 보니까 그때 벌써 외채불안론이 고개를 드는 데도 당국은 염려말라고 큰소리만 치고 있다고 걱정하고 있다.

베니스의 유대인 상인 샤일록은 빚을 갚지 못하면 살 한 파운드를 베어내라고 윽박지르는데 천하태평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빚에 빠져드는 순서를 봅시다.

먼저 장사할 돈을 마련하려는 기업이 은행 등 금융기관에 빚을 집니다.

외국에서 싼 이잣돈을 꿔온 금융기관이 외채 더미에 빠져듭니다.

국가부도를 막으려고 국가가 보증을 서며 역시 빚더미에 빠져듭니다.

기업이 봉급을 깎고 고용을 줄이니 가정이 빚을 안게 됩니다.

소비를 줄이지 못한 내가 카드 빚을 갚지 못하고 빚더미에 앉게 됩니다.”

“그 대가를 어떻게 치르는가 순서대로 봅시다.

금융기관은 문을 닫거나 남에게 점포를 팔아야 합니다.

기업은 부도를 내고 쓰러집니다.

살아 남으려는 기업은 과다차입 줄이랴, 상호 빚보증 해소하랴 덩치를 절반으로 줄여도 부족할 지경입니다.

국가는 경제 주권을 당분간 유보하고 수백조원의 정부 보증서를 작성합니다.

가계는 허리띠를 조르느라 안간힘을 쓰고 나는 개인 파산 신청서를 법원에 냅니다.”

(기록에 따르면 한국의 첫 개인 파산 신청자는 96년 12월10일 서울지법에 파산선고 신청을 낸 현모여인. 카드 사용대금과 사채 등 빚이 모두 2억6천만원. 일본 경제의 거품이 본격적으로 빠지기 시작한 92년의 일본 파산선고 신청은 4만3천여건, 96년 미국의 개인 파산 건수는 1백만건, 한국의 최근 금융신용 불량자는 2백11만명. ) “문제는 이렇게 힘써도 빚더미에서 빠져 나오기가 힘들다는 것입니다.”

“애당초 왜 빚을 지게 됐나요.” “가난하기 때문이죠. ” “천국은 가난한 자의 것이다, 빚쟁이는 가난하다.

고로 천국은 빚쟁이의 것이다.

이렇게 되면 빚도 나쁜 게 아니군요. ”

“1인당 소득 1만달러의 국민이 어떻게 물질적으로 가난하다고 하겠습니까. 끝없는 성취 욕구 (?) 때문에 외상이면 소도 잡아 먹겠다는 헝그리 정신이 마음을 가난하게 만든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마음이 부유해야 하겠군요. 가득 찬 마음은 교만과 독선 뿐이라는데…. ” “마음의 부자 (富者) 는 관대와 아량으로 가득 찼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빚더미 세상을 헤쳐 나가려면 평상심을 되찾아야 합니다.”

“대통령당선자와 대기업 총수들이 만나 기업의 구조개혁에 합의하고, 노사정 (勞使政) 대표가 만나 실업 발생의 선후책을 토론하는 것은 모두 마음을 비웠기 때문에 가능한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빚더미를 탈출하려는 마음은 가난한 마음, 즉 겸손한 마음이 되겠지요.” 빚지고는 살 수 없다는 미덕을 실천하는 길이 가난한 마음에 있는지, 풍요한 마음에 있는지 정말 헷갈린다.

김성호<수석논설위원>

※이번 주부터 금요일字에 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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