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군정 아래 일본과 IMF아래 한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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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연합군총사령부 (GHQ) 하의 일본의 개혁과 국제통화기금 (IMF) 체제하의 한국의 개혁은 외부에서 강요된 것이라는 점에서 유사하다.

또 일본은 패전으로, 한국은 대외채무상환능력상실이라는 '경제적 패전' 으로, 경제.사회적 여건이 최악에 이른 상태에서 개혁과제를 안게 되었다는 점에서도 비슷하다.

더구나 정부가 대내외적 신뢰를 잃어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무정부' 상태에서 개혁이 강요되는 계기를 맞게 되었다는 점에서도 두나라는 같다.

또 외부의 부국 (富國) 이 자금을 지원하면서 개혁을 요구하는 점도 비슷하다.

그러나 개혁과제의 강도와 범위, 또 사회적 수용태세 등 면에서 두나라는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 차이때문에 한국의 개혁추진이 더 어려울 수 있다는 분석이다.

◇ 일본은 大개혁, 한국은 中개혁 = GHQ가 요구한 경제개혁은 한마디로 군국주의의 경제를 민주화하라는 것이었다.

패전당시까지의 일본경제를 뿌리부터 뜯어고치라는 주문이었다.

이에 비해 IMF의 금융조건은 한국경제를 더욱 개방하고 시장경제化하라는 주문이다.

개혁의 범위와 강도면에서 일본에 더 많은 것을 요구했던 것이다.

류관영 (柳寬榮) 산업연구원 일본연구센터장은 GHQ하의 일본개혁을 '大개혁' 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에 비해, GHQ체제가 끝난후 통산성을 중심으로 산업정책이 전개되어 고도성장시대로 접어들게 되는 과정은 中개혁이었고, 또 두번에 걸친 오일쇼크로 경제를 고부가가치.에너지절약화한 것은 小개혁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그만큼 GHQ하에서의 개혁은 광범위했고 그 충격도 컸다는 지적이다.

이에 비해 지금 IMF가 한국에 요구하는 개혁과제는 中개혁에 해당한다는 것이 柳센터장의 판단이다.

"IMF의 개혁과제들이 일본을 따라잡는 개발연대가 끝난 후 한국이 진작부터 추진했어야 할 것들이다.

만일 이런 일이 없었다면 과거의 타성에 젖어 구조개혁을 마냥 끌었을 것이다.

IMF때문에 이들 과제추진이 가속화될 뿐" 이라고 그는 평한다.

◇ 개혁 수용 태세 = 게이오大의 요시노 (吉野) 교수 (경제학과) 는 "일본인들이 GHQ의 개혁과제를 '쉽게' 수용할 수 있었던 것은 정부에 대한 신뢰붕괴때문" 이라고 설명한다.

그는 "패전으로 정부를 믿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나 나라살림에 대해 누구엔가 의지를 해야 했던 당시의 일본인에게 GHQ는 새로운 신뢰의 대상으로 손색이 없었다.

또 정신적 지주였던 천황이 패전후 첫설날 인사말을 통해 '천황은 신이 아니다' 며 GHQ체제를 수용하라는 강한 메시지를 보낸 것도 한몫을 했다" 고 분석하고 있다.

또 김도형 (金都亨) 박사 (一橋大경제학과) 는 "GHQ의 요구조건이 민주화.산업화.봉건질서타파 등 나름대로 일본에 유리하다는 인식이 지식인과 근로층에 확산된 것도 일본인의 개혁수용을 쉽게 했다" 고도 해석한다.

부문별로 보면, 재벌해체의 경우 이미 일본자체가 패전전부터 이미 소폭이긴 했으나 재벌개혁을 추진하고 있었다는 점이 관심을 끈다.

그 외의 개혁과제, 즉, 농지개혁과 노동개혁은 이미 지식인과 해당일본인들로부터 지지를 받고 있었던 과제들이라는 점에서 美군정의 개혁과제는 군정시대이전에도 '개혁의 씨' 가 뿌려져 있었다고 봐도 무리가 없는 것 같다.

한국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개혁의 대상들이 모두 반대하고 있는 상황이다.

여타부문의 끈질긴 지적과 비판에도 불구하고 재계가 재벌의 구조조정을 미루어왔고, 국내외의 조언에도 불구하고 노동계가 (정리해고제 도입 등) 노동시장의 유연화를 극단적으로 반대해 왔다.

또 금융기관의 건실화를 추진해야 할 금융기관들은 '자력으로는 불가능하다' 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는 형편이다.

한마디로 일본의 경우는 그 개혁추진주체들이 소극적이긴 했으나 개혁추진에 대해 긍정적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개혁이 강요되었을때 추진주체가 전면에 나서기가 쉬웠다.

이에 반해, 한국의 경우는 개혁추진주체들이 대부분 난색을 표하고 있다는 점이 차이라면 차이다.

벌써 일부부문에서 조짐이 나타나듯이 잘못하면 개혁추진이 지지부진할 수 있다.

그래서 과거 어느때보다 지식인과 정치권의 지도력 (指導力) 발휘가 절실하고, 또 그만큼 경제주체들간의 사회적합의 (社會的合意)가 요망된다.

◇ 구조조정 여건 비교 = GHQ의 개혁과제는 총론에 관해서는 국내외적으로 이견이 없었다.

그러나 이를 이루기 위한 구체적 정책수단에 이르면 이견이 많았다.

또 GHQ가 군정초기에 가졌던 개혁의지는 여건변화때문에 완화할 수 밖에 없었다.

냉전체제때문이었다.

일본의 경제를 부흥시켜 우방으로 키우는 것이 일본의 민주화보다 더 우선하는 군정목표가 된 것이다.

그래서 당초 '非군사화와 민주화' 차원에서 강하게 밀어부치던 재벌해체.농지개혁.노동개혁이 상당부분 '독소조항' 들이 군정후기에 가서는 후퇴 또는 '전환 (轉換)' 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 이런 대외여건의 개선 (?) 은 기대하기 힘든 상태다.

냉전도 끝나 더이상 서방제국들이 '한국을 봐 주지 않을 것' 이기 때문이다.

IMF의 개혁과제를 어쩔 수 없이 충실히 이행하는 길 밖에 없는 것 같다.

◇ 구조개혁 성공 가능성 = 외부에서 강요된 구조개혁을 구상하는데 美군정하의 일본은 수년이 걸렸고 그 추진도 수년에 걸쳐서 진행시켰다.

미국은 2차대전 종결 3년전부터, 전쟁이 끝난후 일본을 어떻게 바꿀 것인지 구상해 왔다.

개혁과제가 그만큼 신중에 신중을 기한 것들이고, 따라서 추진과정에서의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는 불과 수주일 사이에 한국정부와 IMF간의 협상에 의해 급조된 개혁과제를 안게 되었다.

그만큼 개혁추진과정에서 실패와 시행착오의 여지가 클 것이라는 우려가 있다.

또 일본의 경우는 최종목표 뿐 아니라, 중간절차와 개혁과제의 구체적 내용까지 중간점검을 하는 체제였으나, 한국의 경우는 최종목표에 관해서만 IMF와 합의했을 뿐 구체적 절차와 추진일정을 정하는 것은 대부분 한국정부의 몫으로 남겨져 있는 상태이다.

김정수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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