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세기를 찾아서]47.<끝>태산의 일출을 기다리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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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오늘의 엽서는 내가 1년 동안 당신에게 띄워온 마지막 엽서입니다. 주소도 없는 당신에게 띄운 엽서였습니다. 나는 무슨 이야기로 이 마지막 엽서를 채울까 망설이다가 내가 마지막으로 찾아간 태산(泰山)과 곡부(曲阜), 그리고 황하(黃河)의 이야기를 적으려 합니다. 산동반도 내륙에 위치한 태산은 당신도 잘 알다시피 오악지수(五岳之首)로 중국의 신산(神山)입니다. 황제(黃帝)로부터 요(堯),순(舜)등 1백여명의 역대 제왕들이 하늘에 봉선(封禪)을 고하는 산입니다. 뿐만 아니라 수많은 시인 묵객 명사들이 이곳에 오르는 것을 일생의 행복으로 여기는 산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남천문까지 실어다주는 케이블카 속에서 그 시절의 정서는 아랑곳없이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를 읊조리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부터 맞닥뜨린 고생은 이루 형언하기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벌받는 느낌이었습니다. 난방과 물마저 끊긴 냉방에서 밤을 지새고 그래도 일출(日出)을 보리라 마음을 다그치며 나선 새벽의 등정은 험난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모든 것이 빙판이 되고 얼음으로 뒤덮인 석경(石徑)은 단 한 걸음을 허락하는데도 인색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일출시간에 겨우 도착한 산정(山頂)에서 다시 세찬 바람과 진눈깨비를 맞으며 기다렸던 2시간은 참으로 긴 시간이었습니다. 그러고도 결국 일출을 보지 못하고 내려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악천후로 말미암아 이미 케이블카는 운행이 중지되었습니다. 선택의 여지가 없어진 하산 길은 오를 때보다 더 험난하였습니다. 과연 태산이었습니다. 한무제(漢武帝)가 태사령 사마담(司馬談)을 기어이 떼어두고 나머지 길은 혼자서 오르겠다고한 이유를 알 것 같았습니다. 그 이웃의 공자가 태어난 곡부에서도 난감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공자를 모신 대성전은 물론이고 역대 제왕들이 다투어 건립한 수많은 사당과 제각·숲·능묘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정신을 만들어내고 이를 관학(官學)으로 삼아 기울여온 엄청난 적공(積功)으로 말미암아 나는 어디서 공자의 모습을 찾아야 할 지 참으로 난감해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나는 태산, 곡부에 이어 황하를 찾아갔습니다. 하(夏), 은(殷), 주(周)를 시작으로 9개의 왕조가 흥망을 거듭한 중원(中原)의 황하를 찾아갔습니다. 이 중원 땅의 황하야말로 문명의 요람이며 지금도 고도인 낙양(洛陽), 정주(鄭州),개봉(開封)을 적시며 흐르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황하는 수량이 줄어 이미 기대했던 옛날의 황하가 아니었습니다. 더구나 석양의 황하도,일출의 황하도 어느 것이나 여전히 자욱한 안개 속에서 잠자듯 수척한 모습을 간신히 드러내고 있을 따름이었습니다. 태산에서 일출을 보지 못하고 곡부에서 공자를 만나지 못하고 다시 황하의 수척한 모습을 안개 속에 묻어두고 돌아오면서 나는 참으로 착잡한 생각에 젖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우선 당신에게 띄울 마지막 엽서의 말이 부족하였습니다. 바야흐로 새해와 새로운 세기를 목전에 두고 있는 오늘 비록 우리들이 목마르게 기다렸던 새날들이 결국 갈증만을 더해줄 뿐이었다고 하더라도,그리고 그러한 새날에 대한 소망이 비록 힘겨운 사람들의 부질없는 환상에 불과하였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작게는 하루의 아침에,일년의 첫날에,그리고 나아가서는 새로운 세기의 벽두에 스스로를 다짐할 수 있는 크고 작은 계기를 부단히 만들어나가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비록 나의 여정이 난감함과 착잡함의 연속이었다 하더라도 나는 이 마지막 엽서에서만은 당신과 내가 나눌 수 있는 최소한의 이야기에 충실하고 싶을 따름입니다. 태산일출을 보지 못하고 험한 얼음길을 내려오면서 몇번이고 다짐했습니다. ‘산 위에서 떠오르는 해는 진정한 해가 아니다.’ 동해의 일출도, 태산의 일출도 그것이 그냥 떠오르는 어제 저녁의 해라면 그것은 조금도 새로울 것이 없다는 자위 같은 다짐이었습니다. 그러나 또 한편 생각해보면 새로운 아침해는 우리가 우리들의 힘으로 띄워올리는 태양이라야 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어둔 밤을 잠자지 않고 모닥불을 지키듯 끊임없이 불을 지펴 키워낸 태양이 아니라면 그것은 조금도 새로운 것이 못될 터입니다. 곡부의 공자 성전에서도 같은 사념에 젖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공자의 모습도 결국은 우리가 찾아낼 수밖에 없음을 절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숱한 사람들이 그려내는 공자의 상과는 상관없는 일입니다. 우리는 그의 진정한 고뇌가 과연 무엇이었는지를 우리들 스스로가 우리들 스스로의 과제로부터 찾아내지 않으면 안될 일이었습니다. 공자의 편력과 고뇌의 산물은 한마디로 군자(君子)였습니다. 춘추전국시대라는 난세에 던져진 군자라는 새로운 엘리트상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군자는 종법사회(宗法社會)의 귀족이 아님은 물론이며 군사전략가인 병가(兵家)나 부국강병론자인 법가(法家)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부단히 배우고(學)실천하며(習)더불어 함께 하는(朋)붕우집단(朋友集團)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가 제시한 것은 붕우(朋友)나 군자라는 새로운 엘리트의 내용에 관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정작 그가 제시한 것은 새로운 엘리트상이 아니라 새로운 시대는 새로운 엘리트가 만들어내는 것이라는 그의 철학에 있다고 생각되었습니다. 그가 시대를 뛰어넘는 만세의 목탁(木鐸)으로 남는 이유가 있다면 이것 이외의 다른 것일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0세기를 만들어낸 엘리트를 그에게 묻는다면 공자는 아마 유가도, 법가도, 병가도 아닌 자본가(資本家)였다고 대답할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새로운 엘리트상을 그에게 묻는다면 우리는 대답을 듣지 못할 것입니다. 그것은 공자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질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질문은 그에게 물을 것이 아니라 우리들이 발견하고 만들어내어야 할 우리들의 몫일 따름입니다. 그는 다만 새로운 시대는 새로운 엘리트가 담보한다는 역사와 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선에서 절제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는 자기 자신을 일컬어 ‘배워서 아는 정도의 사람(學而知之者)’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가장 어리석은 사람을 ‘곤경을 당하고서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困而不知之者)’이라고 했습니다. 생각하면 우리를 절망케 하는 것은 비단 오늘의 곤경뿐만이 아니라 줄곧 수없는 곤경을 당해오면서도 끝내 깨닫지 못했던 우리들 스스로의 무심(無心)함에 있음이 사실입니다. 세모의 한파와 함께 다시 어둡고 험난한 곤경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나는 이 험난한 곤경이 비록 우리의 크고 작은 달성을 무너뜨린다 하더라도 다만 통절한 깨달음 하나만이라도 일으켜 세울 수 있기를 바랄 따름입니다. 당신에게 보내는 마지막 엽서를 끝내고 옆에다 태산일출을 그렸습니다. 그리고 잠시 생각한 후에 그림 속의 해를 지웠습니다. 물론 일출을 보지 못하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태산에 아침해를 그려넣는 일은 당신에게 남겨두어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곤경에서 배우고 어둔 밤을 지키며 새로운 태양을 띄워올리는 새로운 사람들의 몫으로 남겨두어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신영복 <성공회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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