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행의 옴부즈맨칼럼]정치지도자들 말많이 하기보다 문제 제대로 짚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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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지난주 내가 인용한 '노자 (老子)' 의 '다언수궁 (多言數窮)' 이란 말에 대해 독자들의 지적과 의견이 분분했다.

물론 '노자' 의 말을 인용한 참뜻은 정치지도자들이 말로써 말이 많고, 그로 말미암아 궁지에 빠지는 상황의 안타까움을 나타내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노자' 가 일컫는 '자주 궁지에 빠진다' 는 뜻의 한자인 '수궁' 에서 '수 (數)' 란 한자는 '수' 라고 읽는 것이 아니라 '삭' 이라고 읽어야 한다는 것이 한 독자의 지적이었다.

이 지적에 대해 나는 두말 없이 동의와 감사의 뜻을 보냈다.

그도 그럴 것이 '수' 란 한자는 비록 같은 글자라 할지라도 그 뜻하는 바에 따라 여러가지 소리 (音) 로 읽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가령 '셈한다' 또는 '헤아린다' 고 할 경우엔 '수' 라고 읽지만 '여러번' 또는 '자주' 라는 빈도 (頻度) 를 뜻하는 경우엔 '삭' 이라고 읽는다.

나아가 '수' 라는 한자는 빽빽함을 뜻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때는 '촉' 이라고 읽고, 그것이 '빠름' 을 뜻하는 경우엔 '속' 이라고 읽는다고 대자전 (大字典)에 풀이돼 있다.

그런데 '다언삭궁' 이란 말과 대구 (對句) 를 이루고 있는 '불여수중 (不如守中)' 이란 말을 함께 읽으면 전체적인 글귀는 '말이 많으면 자주 궁지에 빠지므로 중 (中) 을 지키는 것만 같지 못하다' 는 뜻이 된다.

이 말의 풀이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견해가 있거니와 나는 정치 또는 지도층에 대한 경고 (警告) 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싶고 그런 풀이에 동의하는 입장이다.

사실 정치세계에서의 '다언' 에는 '방언 (放言)' 과 '위언 (危言)' , 그리고 '난언 (亂言)' 이 뒤범벅이 되게 마련이다.

그렇게 될 바엔 차라리 '중' 을 지키는 것이 바른 자세이겠는데, 여기서 말하는 '중' 은 단순히 가운데나 중립 (中立) 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중' 이란 한자는 어떤 물체나 공간 (空間) 의 한가운데를 뚫은 모양을 본뜬 것인데 그것이 지닌 자의 (字義) 나 철학적 함의 (哲學的 含義) 는 심오하기 그지없는 것이다.

'도덕경 (道德經)' 에서는 '중' 을 '충 (沖)' 과 같은 뜻의 것이라고 보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충' 이나 '중' 은 도 (道) 의 본질과 상통하는 것이라고 풀이된다.

정치의 세계에서 '중' 을 지키지 못하거나 벗어났다는 것은 곧 본질에서 탈선했음을 뜻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뿐만 아니라 정치지도자의 덕목으로서의 '중' 이라는 것은 자기를 비우고 사방의 인재를 모아 큰 산과 큰 바다를 이루는 창조적인 것이라고 일컬어지기도 한다.

이런 뜻에서 앞으로의 정치에서는 '말' 을 많이 하는 것 (多言) 보다 '중' 을 지키는 것 (守中) 이 바람직하다고 강조해 두고 싶다.

그런데 본질로서의 '중' 은 정신적 가치의 중요성을 말해 주는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실 오늘날의 정치부패나 경제위기의 본질을 생각해 보면 무엇이 진짜 문제인지를 길게 설명할 나위도 없지 않나 싶다.

일찍이 임정 (臨政) 요인이었던 일민 (一民) 신규식 (申圭植) 선생은 '한국혼 (韓國魂)' 이란 글을 통해 우리나라가 망하게 된 원인으로 ①법치 (法治) 의 어지러움②지식이 열리지 못함③남에게 아첨하며④쓸데없는 자존심 (自尊心) ⑤지나친 자기열등감 (劣等感) ⑥당파 (黨派) 를 꾸며 사욕 (私慾) 을 채우는 것 등을 지적하면서 이렇게 된 근본은 정신과 양심이 썩은 때문이라고 통탄했다.

이런 일민의 지적은 비록 오랜 세월이 지난 것이건만 오늘의 우리에게 하는 말이라고 느껴질 정도다.

일민은 우리의 정신과 양심이 썩은 원인으로 크게 네 가지를 손꼽은 바 있다.

첫째는 선조 (先祖) 들의 교화 (敎化) 와 그 종법 (宗法) 을 잊은 때문이고, 둘째는 선민 (先民) 들의 공렬 (功烈) 과 그 이기 (利器) 를 잊은 것이고, 셋째는 제 나라의 역사를 잊어버린 것이고, 넷째는 나라의 치욕을 잊어버린 때문이라는 것이다.

내가 이런 일민의 말을 떠올리게 된 까닭은 지난주 신문을 보면서 너무나 많은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언론이란 물론 '다언' 을 다룰 수밖에 없는 것이긴 하지만 그 속에서 지켜야 할 본질 문제로서 언론의 '중' 은 무엇인가 하는 의문부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게다가 우리나라의 역사학계가 이른바 단군학회 (檀君學會) 를 창립했다는 소식은 새삼스럽게 일민이 통탄했던 제 역사의 모름을 떠올리게 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중앙일보를 비롯한 우리나라의 유수한 신문들은 단군학회 창립 관련 기사를 아예 무시하거나 소홀히 취급했을 뿐이었다.

물론 대선정국과 IMF 관련기사로 폭주를 이루는 상황에서 역사학계의 그런 움직임을 간과할 수도 있는 것이고, 그렇다고 그것이 문제로 될 이유는 조금도 없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역사학계가 단군학회를 창립했다는 것은 그야말로 역사적인 것이며 일대사건이라고 평가하기를 서슴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것은 우리 역사와 우리정신의 바로알기와 바로세움의 첫 출발을 이룰뿐만 아니라 남북한 관계와 21세기의 민족적 과제를 푸는 기초가 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단군과 고조선의 역사는 일제 (日帝) 와 식민사학자에 의해 심히 훼손됐고, 그동안의 연구도 재야 (在野) 사학자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고작이었다.

역사학계가 이 문제에 본격적으로 광범위하게 참여함으로써 역사적 실체로서의 단군과 한민족의 정체성을 확립키로 했다는 것은 매스컴으로서도 마땅히 크게 주목해야 할 일이라고 믿는다.

이규행 본사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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