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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 문화 '새뚝이']'불쌍한 사랑기계'로 김수영문학상 수상 김혜순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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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사랑에 대한, 온 세상의 것들로서의 너에 대한, 무엇보다 인간의 자존심으로서의 자신에 대한 아픔. 그 아픔에 솔직한 꼭 그만큼만 시로 되어 나와야 한다.

그래야 '나 역시 그만큼 아프오' 라는 고독한 독자의 혼에 깊은 울림을 주며 위안으로 다가갈 수 있다.

“사람들은 알까? 한밤중 불을 탁 켜면 그 밤의 어둠이 얼마나 아파하는지를. …창 밖으로 불 밝힌 집들. 밤은 저 빛이 얼마나 아플까” (시 '쥐' 중에서) 시집 '불쌍한 사랑 기계' (문학과지성사刊) 로 올해 제16회 김수영 문학상을 수상한 김혜순 (42) 씨. 시가, 문학이 고통도 치장하며 비누방울처럼 가볍게만 둥둥 떠오르던 올해 김씨는 이 한권의 시집으로 문학의 위엄을 과시했다.

김씨는 시를 위해 항상 떠난다.

익숙했던 시어와 세상 그리고 자기 자신으로부터도 떠나며 항상 더 깊은 새로움을 찾는다.

위 시 '쥐' 에서처럼 밤새 잠 못들고 어둠의 생리를, 마음속 깊은 곳을 응시하기도 한다.

김포 매립지나 쓰레기더미로 남은 재개발 아파트지역 혹은 황학동 벼룩시장등을 찾기도 한다.

더러 남미 고산지대 인디오 여인들의 추레한 꿈과 한을 찾기도 한다.

그런 곳에서 20세기말 우리의 서울을 읽기도 하고 자신의 내면에 감춰진 신화적 여성성을 탐구하기도 한다.

"빈 성냥갑 뮤즈. 초콜릿 껍데기 뮤즈. 읽어치운 신문 뮤즈. 286컴퓨터 뮤즈. …내 자서전은 매일 새로운 뮤즈를 사고, 또 거의 매일 죽은 뮤즈의 시체를 버렸다는 기록만을 남길 수 있으리. " (시 '다시, 나는 너희들을 뮤즈라 부르련다' 중에서) '시는 한 세상을 읽어내는 방법을 보여주어 그 사회를 이끄는 문화의 화살촉' 이라는 김씨는 삶 자체를 화살촉처럼 시를 향해 곤두세우고 있다.

그런 시인의 자세가 있기에 컴퓨터시대에도 우리는 뮤즈를 꿈꿀 수 있다.

아니 시를 진정 받들어 섬기는 김씨 자신이 우리 시대 뮤즈인지도 모른다.

6개월이 넘도록 몸져 누워 있었을 때도 김씨는 "나는 죽어서도 늙는다/나는 죽어서도 얼굴이 탄다" 라는 시구를 토해내고 씻은듯 병석에서 일어났다.

주위의 모든 것을 작은 가슴에 끌어당겨 한없이 삭이고 사랑하여야 하기에 시인은 아프다.

양지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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