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 일, 독일과 다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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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 예영준 도쿄 특파원

본은 독일의 정치 지도자들보다 훨씬 더 여러 번 사죄했다."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하는 이 발언의 주인공은 마치무라 노부타카 일본 외상이다. 그는 지난달 29일 뉴욕의 한 호텔에서 미국 학자.외교관들이 참가한 가운데 일본의 외교정책을 설명하는 연설을 했다. 뒤이어 청중의 질문에 답하는 과정에서 "일본은 과거사를 조금도 반성하지 않고 있다는 말이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고 하면서 이같이 말했다.

마치무라 외상이 이 같은 말을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지난달 14일에도 국회에서 "독일과 일본의 과거 행위와 전후 처리를 단순 비교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말했다. "나치 독일은 인종 말살 정책을 폈지만 일본은 그렇지 않았다"며 "(희생자의) 수와 (과거 행위의) 성격이 서로 다르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그의 두 차례 발언은 왜 한국과 일본, 중국과 일본 간에 과거사 문제로 끊임없이 분란이 되풀이되고 있는지에 대한 명쾌한 해답을 준다.

한국.중국은 일본의 과거사 반성과 사과가 부족하다고 거듭 강조한다. 반면 일본은 마치무라 외상의 발언에서 보듯 "할 만큼 반성했다"고 말한다.

그의 발언은 또 과거 일본이 잘못을 하긴 했지만 독일만큼 큰 죄를 저지르지는 않았음을 은연중에 드러내고 있다.

그러니 "더 이상의 반성을 일본에 요구하는 것은 곤란하다"는 인식이 행간에 깔려 있다. 최근 한국 지도자들이 일본과 독일의 과거 청산을 비교한 데 대한 반발을 그렇게 드러낸 것이다.

마치무라 외상은 도대체 어떤 근거로 그런 발언을 했을까. 일본 외무성 관계자는 "역대 일본 총리와 독일 대통령.총리의 공식 연설.담화문 등에 담긴 과거사 사과 표현 횟수를 비교한 결과를 토대로 한 발언"이라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이는 극히 형식주의적인 논리로 비판받아 마땅하다. 과연 반성의 척도를 횟수로만 따질 수 있는 것일까.

과거사 반성을 다짐한 당사자인 총리가 태평양전쟁 A급 전범 14명이 합사된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는 것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미사여구로 포장된 반성의 말이 아니라 단 한 번의 진심 어린 행동이 과거 청산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일본은 간과하고 있는 듯하다.

예영준 도쿄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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