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노동계 새판 짜기 … 제2의 민주노총이 안 되려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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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6면

민주노총 산하 노조에 탈퇴 도미노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지난 3월의 영진약품·NCC 등 5개 노조가 이탈한 데 이어 인천지하철공사 노조와 인천국제공항공사 노조가 지난 10일 민주노총 탈퇴를 결의했다. 파업철이라 불리며 한때 강경 투쟁의 대명사로 알려졌던 서울도시철도 노조도 탈퇴 수순을 밟고 있다. 민주노총의 핵심 기반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민주노총이 이렇게 막다른 골목으로 몰리게 된 것은 한마디로 자업자득이다. 인천지하철 노조는 한때 민주노총의 전위부대라 불릴 정도로 강성 노동운동을 벌여왔다. 이런 노조가 재투표까지 하면서 민주노총을 버리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조합원들의 권익 보호 및 향상은 외면한 채 정치투쟁을 일삼으면서 각종 비리에 휩싸인 조직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는 압도적인 탈퇴 찬성률(인천지하철 노조 68%, 인천국제공항공사 83.9%)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3일에 한 번꼴로 정치집회를 요구하고, 성폭력 은폐 시도까지 하는 상급단체에 조합원들은 실망했다”는 노조위원장의 언급에 ‘민주노총 탈퇴 회오리’의 배경이 압축돼 있다.

이번 사태로 노동운동 양상이 바뀔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역사적인 사례를 봐도 강성 기류의 노조가 종말을 고한 이후에는 실리 추구형 노조가 등장하곤 했다. 미국은 1920년대에 자본가를 적대시하며 강성 투쟁을 펼치던 ‘노동기사단(Knights of Labor)’이 대중의 버림을 받자 온건하고 현실적인 미국노동총연맹(AFL)이 빈자리를 메웠다. 일본의 경우도 1970년대에 투쟁 위주의 ‘일본노동조합총연맹’이 무너지고 실리 위주의 ‘일본노동조합총연합’이 노동운동의 주도권을 쥐었다. 총연맹의 붕괴는 그들의 끝없는 정치투쟁에 대해 조직원과 국민들이 등을 돌렸기 때문이었다. 이런 관점에서 민주노총의 붕괴는 투쟁 위주 노동운동의 쇠퇴와 실리주의 노동운동의 등장을 예고하는 신호탄으로 볼 수 있다. 최근 민주노총을 이탈한 노조들이 입을 모아 ‘실용노선’을 천명한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고 본다.

하지만 새로운 노동운동이 대중 속에 진정으로 뿌리내리려면 추진 주체들이 비장한 각오를 해야 한다. 무엇보다 노조 간부가 아니라 근로자가 노조의 주인이라는 인식을 가져야 한다. 또 시장의 소리에도 귀를 기울일 줄 알아야 한다. 무엇보다 도덕성을 잃지 말아야 대내외적인 이해와 지지를 얻을 수 있다. 이런 조건들을 갖추지 못한다면 아무리 실용을 외치며 새 조직을 만들어 봐야 제2, 제3의 민주노총이 되기 십상이다. 14년 전 출범 당시 ‘노동자를 위한 노동자의 단체’를 표방했던 민주노총이 오늘날 어떤 모습으로 타락했는지 보면 알 수 있다. 인천지하철 노조는 “정치적 파업투쟁을 지양하고, 조합원의 고용안정과 근무여건 개선에 주력하는 노조로 다시 태어날 것”이라고 천명했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국민들은 이런 각오가 유야무야되지 않기를 기대하며 실천 여부를 지켜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