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에서]분단의 희생양이 된 어린 제자에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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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사랑하는 야. 교실 뒤 칠판에 있는 '사랑하는 꿈나무들아' 자리엔 아직도 예쁘기만 한 너와 엄마의 모습이 나를 바라보고 있단다.

'지혜롭고 총명하며 남을 배려할 줄 아는 아이가 되었으면' 하고 바라는 엄마의 글씨와 '꼭 훌륭한 과학자가 되겠어요. 아빠.엄마' 라고 또박또박 써 코팅한 하트 모양의 예쁜 종이가 붙어있는 것을 보면서 선생님은 하루도 네 생각을 잊은 적이 없었지. 네가 전학가던 날은 화사한 초여름이 시작되던 5월의 마지막 주일이었지. 누구보다 밝고 행복하게 살아야 할 우리 예쁜 공주가 엄청난 민족의 비극으로 희생된 아빠의 소식도 모른 채…. 입학초, 3월엔 왜 그렇게 아빠.엄마 모습을 그리고 가족들의 생활모습을 발표하는 수업이 많았던지…. 그럴 때마다 "선생님, 우리 아빠는 미국에 공부하러 가셨어요" 하던 카랑카랑한 네 목소리.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선생님 가슴엔 소리없는 눈물이 흘러내렸지. 간첩들의 소행이 틀림없다고 생각했지만 이번 부부간첩 사건으로 사랑하는 너의 아빠 (이한영씨) 살해 진범들이 남파된 북한 특수공작원이란 소식을 듣고 북한이 얼마나 악랄하고 무서운지 치가 떨린다.

네가 자라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그러나 걱정하지마. 훌륭하신 네 엄마와 가족들이 너를 지켜줄 거야. 자유와 평화를 찾아 이곳에 오신 아빠는 뜻을 이루진 못했어도 너는 이 땅에서 뿌리를 내리고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거야. 착하고 건강하고 슬기롭게 자라거라. 그래서 하늘나라 아빠를 기쁘게 해드려라. 사랑하는 딸이 학교에 입학하기도 전에 "어떤 선생님을 만날까" 하고 가슴 설레면서 산 노란색 스웨터를 선물해준 너랑, 너의 아빠.엄마를 언제나 생각할 거야. 사랑해. 너를 처음 담임했던 1학년 선생님이. 사문자〈교사.서울강동구상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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