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실업 시대]10.<끝>동요하는 샐러리맨…감원 공포에 자존심 뒷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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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회사에서 간부들에게 일괄사표를 내라고해서 어쩔 수 없이 사직서를 제출하고나니 밤잠을 이룰수 없더라고요. 그렇다고 고민을 집사람에게도 털어 놓을 수 없더군요. 요즘 지병인 위궤양만 도지는등 심신이 피곤합니다.” (S건설 L부장)

"감원바람이 남의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활로를 찾아야 겠더라고요. 생각끝에 얼마간 모아둔 돈으로 주식투자를 했지요. 회사를 떠날 경우 재취업도 쉽지 않을 것 같고해서 대학원 진학자금을 마련해두려 했읍니다.

그러나 주식값이 곤두박질 치는 바람에 이젠 그 희망마저 날려 버렸읍니다. " (M그룹 K과장) "회사분위기요. 말도 말아요. 회사에서 임원감축 계획을 발표했으니 곧 일반직원들에도 화살이 돌아오겠지요. 아주 뒤숭숭합니다.

한마디로 바늘방석에 앉은 기분으로 하루하루를 지내고 있읍니다. " (H그룹 S대리)

"감원없이 감봉한다는 회사발표에 안도했읍니다.

월급이 일부 깎여도 쫓겨나지 않게된 것만해도 다행이라 생각하고 있지요. " (D그룹 P과장) 국제통화기금 (IMF) 자금지원을 계기로 국내 굴지의 그룹들마저 앞다퉈 비상경영체제로 돌입하면서 샐러리맨들이 크게 동요하고 있다.

지난해 몇몇기업이 명예퇴직을 실시할때는 그것이 비난의 대상이 되고 명퇴자들을 측은하게 여겼지만 이젠 명퇴 자체가 부러움의 대상이 될 정도다.

최근 상장업체를 대상으로 조사한 기업체 감원현황을 보면 감량경영 바람이 번지기 시작한 95년12월부터 올 상반기까지 전체임직원의 10%이상 줄인 곳이 1백40개사에 이른다.

그러나 최근에는 몇개 굴지그룹을 제외하곤 20% 수준의 인원감축은 기준선 처럼 되고있다.

"20년여동안 기업에 몸담아오면서 고생도 했지만 보람도 적지 않았지요. 대그룹에 다닌다고 주변의 부러움도 샀읍니다.

수출 한 건 올리면 서울 강남의 내로라하는 술집에서 한껏 술을 마시는 호기도 부렸지만 이젠 상황이 1백80도 달라졌읍니다. " 지난해 어렵게 기업의 별인 임원자리에 오른 D그룹의 K씨는 "대부분의 샐러리맨들은 요즘 감원 공포속에 자존심을 집에 두고 다닌다" 며 이같이 말했다.

이제 회사는 임직원들을 ▶반드시 있어야 할 사람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될 사람 ▶없어도 될 사람으로 분류해 가는 추세이다.

"지난해 대학선배가 직장을 떠나며 주변의 눈총이 따가워 할수없이 명예퇴직금을 들고 이민을 간다는 말을 들었을때 면전에서 나라를 등지는 이유가 뭐냐며 핀잔을 주었는데 이젠 그분의 심정이 이해가 됩니다." 입사초년생인 한 샐러리맨은 선배사원들의 어깨가 최근들어 부쩍 처져 있어 말을 붙이기 조차 어려울때가 많다며 이렇게 말했다.

'고개숙인 샐러리맨' 은 앞으로 더 늘어날수 밖에 없는 현실이다.

기업들은 생존의 차원에서 감원.감봉등의 조치가 불가피하다는 입장. 그러나 그 구성원들은 그같은 총론은 이해를 하면서도 왜 하필이면 자신인가라는 각론에 이르러선 동의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D그룹의 관리담당 임원은 "인건비 비중이 매출액의 6~8%를 차지하는 상황에서 10%를 감원하면 당기순이익이 절반이상 호전되는등 재무개선효과가 크다" 고 말했다.

하지만 대량감원이 확산 될 경우 정치.사회문제등을 불러 일으킬 소지가 적지 않다.

선진외국과 달리 실업수당등 사회보장제도가 미흡한데다 재취업 여건도 나쁜편이어서 퇴직하면 당장 생계에 위협을 받는다.

한국노총 정책본부 김종각 (金鍾珏) 연구원은 "임금보다 고용자체가 심각하다" 며 "고용이 보장될 경우 임금삭감은 불가피하다" 고 말했다.

고윤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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