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 “힘들여 외화벌이해 산 비행기 다 해먹을 거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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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북한의 전투기가 잇따라 추락하고 있다. 지난 2월 첫 사고 이후 이달까지 모두 3대다. 함북 무수단의 로켓 시험발사장을 지키거나 한·미 군사연습에 대응하는 훈련을 벌이다 떨어진 것이다. <본지 4월 7일자 1면>

정보 소식통은 9일 “사고 전투기가 모두 옛 소련으로부터 도입한 미그-23기”라며 “전투기가 이처럼 단기간에 연쇄 추락사고를 낸 것은 매우 이례적”이라고 말했다. 로켓 발사가 이뤄지기 하루 전인 4일 무수단기지 앞 동해상에는 미그-23기 한 대가 떨어졌다. 이날부터 초읽기에 들어간 북한의 로켓 발사 움직임을 한·미 정보 당국이 실시간 화면으로 지켜보는 가운데 전투기의 이동 궤적이 갑자기 바다 위에서 사라진 것이다. 일본의 로켓 요격 검토에 대응해 인근 어랑 공군기지에 이동 배치했던 미그기였다. 무수단 호위에 나섰다 사고를 내자 한·미 측은 사태 파악에 분주했다고 한다. 북한 당국도 평양에서 사태 수습을 위해 헬기를 급파했다는 게 정보 당국의 파악이다. 이 때문에 한때 우리 정보 라인 일각에서는 “김정일이 헬기로 무수단기지를 방문한다”는 관측이 제기되기도 했다.


이보다 3주 전인 3월 13일에는 평남 개천에 사령부를 둔 공군 제1비행사단 60연대 소속 미그-23기가 인근 북창비행장을 이륙해 임무를 수행하던 중 갑자기 추락했다. 관계자는 “당시 한·미 연합 키 리졸브 훈련에 대응하기 위해 출격했다가 사고를 당한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고 말했다. 북한의 로켓 발사 움직임이 처음 포착된 직후인 2월 20일에도 같은 비행사단 소속 미그-23이 떨어졌다. 1980년대 말 북한에서 도입할 당시 가격으로 500만 달러가 넘었던 전투기가 추풍낙엽이 된 셈이다. 정보 관계자는 “사고가 이어지자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이병철 공군사령관에게 ‘힘들여 외화벌이해 사들인 비행기 다 해먹을 거냐’며 격노했다는 첩보가 있다”고 귀띔했다.

북한은 첫 추락 이후 동일 기종 전투기에 운항 중단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기체 결함 등의 조사 결과가 나올 때까지 운항을 중단하는 관례를 벗어난 것이다. 미그-23은 북한 공군이 40여 대밖에 보유하지 못한 상대적으로 신형인 기종이다. 120여 대를 갖고 있는 주력기 미그-21보다 한 단계 업그레이드됐다. 공대지 공격이 가능해 우리 군의 F-16에 견줄 수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정보 관계자는 “미그-23의 경우 베테랑 조종사가 몰기 때문에 조종 미숙 등에 의한 사고는 거의 없는 편”이라며 “수리 부속 부족으로 인한 정비 불량이나 기체 결함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또 “한·미 훈련 대응과 로켓 발사 지원 등에 무리하게 동원됐다 떨어진 것으로 판단된다”고 덧붙였다.

국방백서에 따르면 북한은 840대의 전투임무기를 보유해 우리 군의 490대보다 훨씬 많으나 미그-29(20여 대 보유)와 미그-23을 제외하면 노후 기종이 대부분이다. 노후 기종인 미그-21의 경우 96년 10~12월 사이 3대가 연달아 추락했고, 2000년 12월에는 미그-21기 2대가 야간훈련 중 추돌사고를 냈다. 북한은 92년 12월 강원도 원산에서 추락한 전투기 조종사 길영조를 ‘김일성 동상과 특각(별장)에 떨어지지 않으려 조종간을 끝까지 놓지 않은 영웅’이라며 체제 선전에 활용한 사례도 있다.

이영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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