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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그때 오늘

경회루 지붕 수놓은 백열전등 연못에 비친 식민 지배의 허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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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5면

에디슨이 발명한 백열등은 8년 만에 1887년 경복궁에도 켜졌다. 1894년에는 창덕궁의 밤도 밝혔다. 그러나 문명의 빛이 궁정의 높은 담을 넘어 종로에도 깃든 날은 1900년 오늘이었다. “전차표 파는 곳을 보니 장안의 남자들이 아홉 시가 지난 후 문이 미어질 정도로 다투어 가며 표를 사서 일없이 갔다 왔다 한다.” 제국신문은 그때 전차 정거장과 매표소를 밝히는 달랑 3개의 가로등 빛에 취한 이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그린다. 한 해 뒤 동대문 발전소의 터빈이 돌아가자 진고개(충무로)와 혼마치(명동)에 늘어선 일본상점가는 600개의 전등으로 불야성을 쌓았다. 조선 사람들은 불빛에 홀린 부나비처럼 밤거리를 누볐다.

1920년대 서울은 이미 문명화의 표상 공간으로 진화했다. 이솝 우화 ‘서울 쥐 시골 쥐’처럼 『별건곤』2호(1926)에 실린 희곡 속 서울사람은 촌사람에게 줄줄이 자랑을 늘어놓는다. “전차·자동차·인력거·자전거. 어디 다니려면 발에 흙 한 점 안 무치고요. 전신·전화·전등 등. 앉아서 100리 밖과 말하고 밤이 낮보다 밝소. 그러저런 기름불 등잔은 보고 죽으려야 없소.” 쫓기는 삶의 실상을 말하지 않았던 서울 쥐처럼 서울사람도 전기 공급을 둘러싼 민족 간 차별을 말하지 않았다.

1934년 11월 24일자 조선중앙일보는 개탄한다. “남촌에는 가로등 시설이 완비되어 도회지로 손색이 없으나 대(大)경성의 중앙지대인 종로 일대는 아직까지도 가로등 하나 없다”고 말이다. 1930년대 조선 사람들이 사는 곳은 여전히 어두웠다. 일제하 가정용 전기요금은 일본에 비해 30~40% 이상 비쌌지만, 대륙 침략을 위한 군사·산업용은 턱도 없이 헐값이었다. 당시 촬영된 사진 속 경회루의 처마와 기둥을 휘감은 방울전구의 조명이 휘황하다. 그러나 수면에 비친 불빛은 망한 왕조를 잊지 못해 흘리는 회억(回憶)의 눈물마냥 번져 흐른다(사진=『모던의 유혹, 모던의 눈물』, 노형석 저 이종학 사진, 생각의 나무).

일제 강점기 도회지의 밤을 수놓은 전등도 흐르는 강물에 떨어진 잉크 몇 방울에 지나지 않았다. 해방 직후까지도 남한은 열 집에 한 집밖에 전등을 달지 못했다. 그때 동양 최대를 자랑한 수풍 수력발전소를 비롯한 발전 설비의 86%는 북녘에 있었다. 그러나 오늘 인공위성에서 본 한반도 야경은 남과 북이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우리의 번영은 일제 식민통치의 유산에 기댄 것이 아니다. 이곳저곳 밝게 빛나는 남녘과 달리 왕성(王城) 평양을 빼고 칠흑 어둠만이 짙게 드리워진 북녘 땅이 이를 증언한다.

허동현(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근현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