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승삼 칼럼]왜 대통령은 안 나서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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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한국경제의 위기는 상상 이상으로 심중하다.

'한국경제가 혼수상태' (워싱턴포스트) 라느니, '이제는 북한보다 한국이 먼저 붕괴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 (뉴욕타임스) 라느니 하는 지적들이 악의적이거나 과장된 것이 아닌 바로 현실 그대로다.

우리 경제의 최전선인 무역현장에서 뛰고 있는 기업인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이런 현실을 피부로 실감해 왔다.

최근 우리 나라 한 대기업이 인도의 공사에 응찰하고 그 입찰보증금을 내기 위해 국내 은행 보증서를 현지 은행에 제출했더니 한마디로 'No' 였다고 한다.

한국의 은행은 이젠 못 믿겠다는 거였다.

비슷한 경우는 싱가포르.이집트와의 거래에서도 발생했다.

"우리가 이집트은행을 못 믿으면 몰라도 이집트가 우리를…" 전 같으면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무역 일선에서 뛰고 있는 실무자들은 조금도 과장없이 '나라가 붕괴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불안감에 사로잡히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대통령을 포함한 정부도, 현 정부를 비판하며 '내가 집권하면 경제를 단숨에 회생시키겠다' 고 호언하고 있는 대선후보들도 아직 우리 경제의 위기를 위기로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는 지적들이다.

강경식 (姜慶植) 전 부총리는 이임하면서야 겨우 "세상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너무도 빨리 변화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를 보는 외부의 시각은 우리의 시각과 상당히 다르거나 정반대일 수 있다" 고 말했다.

실로 만각 (晩覺) 이다.

어디 姜전부총리뿐이었던가.

미국과 유럽은 9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국제경제질서 개편을 놓고 각축을 벌여왔다.

바로 이웃의 경제대국 일본마저 새 질서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 금융빅뱅을 일으키는 등 거국적인 노력을 기울여 왔다.

그런데 더욱 더 허리띠를 졸라매고 머리를 짜내야 할 약소국 한국은 오히려 천하태평의 자세였던 것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 (OECD)가입을 무슨 선진국 면허장이나 딴 듯이 자랑한 게 이 정부 아니었던가.

경제부총리와 통상산업부장관을 갈면 그만인가.

이런 국가적 위기에 대통령은 무엇을 하고 있나. 경제관료만 바꾸고 자신은 그 등 뒤에 숨을 일인가.

아무리 정권말기의 레임덕 상태라고 해도 대통령은 엄연히 대통령이다.

능력이 있건 없건간에 의무적으로 해야 할 일이 있다.

눌변이면 어떤가.

이런 위기에야말로 TV에 나와서 경제의 실상을 진솔하게 알리고 국민이 지나친 비관이나 자포자기감에 빠져들지 않도록 용기와 희망을 붇돋워 주는 말을 한다면 설사 겉으로는 변함없이 욕할지라도 속으로는 다소나마 위로를 받을 것이다.

경제문제가 경제대책으로만 풀리는 것은 아니다.

미국의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대통령에 취임했던 1933년은 미국의 대공황이 최악에 달했던 때였다.

그러나 루스벨트의 취임연설 한마당이 그런 미국사회의 분위기를 일순간에 반전시켰다고 역사가들은 전하고 있다.

루스벨트 대통령이 연설에서 현실을 장밋빛으로 색칠을 한 것도 아니고 화끈한 경제회복책을 제시한 것도 아니었다.

그는 단지 미국이 처한 어려움을 솔직히 털어놓았다.

그러면서 확신에 찬 어조로 장래에 대한 낙관과 자신감을 피력했을 뿐인데 수천통의 격려전보가 백악관으로 쏟아져 들어왔고 국민의 가슴 속에 용기와 희망이 되살아났던 것이다.

정치지도자의 말과 행동은 그렇게 위대하고 중요한 것이다.

물론 인기바닥의 현 대통령이 나서서 무어라 한들 루스벨트 대통령의 연설과 같은 효과를 거둘리야 없다.

그러나 효과를 저울질할 것 없이 대통령이라면 의무감에서라도 전면에 나서 이 위기를 타개해나가야 마땅하다.

이제 더 떨어질 인기도 없다.

무엇을 주저하겠는가.

이런 판에도 대선주자들은 옥외집회와 조금도 다름없는 대규모 체육관집회를 다투어 열지를 않나 '우리가 남이가' 하는 망국의 지역감정을 되살리지를 않나 국민에게 다음 5년마저 암담하다는 느낌이 들게 하고 있다.

중립 대통령이 무엇을 두려워하랴. 이런 작태부터 TV에 나와 질타하면서 국난 (國難) 타개에 여야 구별 없이 중지를 모아 국민에게 우선 용기와 희망을 주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 사회에 활기가 되살아 나고 또 그래야 외국도 우리 장래를 믿게 돼 금융위기를 해결할 길도 열릴 것이다.

유승삼 <중앙m&b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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