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회 삼성화재배 세계바둑오픈] 비겁한 호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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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면

'제13회 삼성화재배 세계바둑오픈'

<준결승 2국>
○·이세돌 9단 ●·황이중 7단

제7보(81~92)=백△가 양쪽의 흑을 노린다. 공격은 공격이지만 아직 살기는 느껴지지 않는다. 상당한 몸값만 지불한다면 포위망은 언제든지 거둬들이겠다는 이세돌 9단의 심사가 읽혀진다. 이세돌은 흑이 대마를 방치하고 계속 실속을 챙긴 데 대해 분노한 척하고 있지만 속으로는 형세를 ‘그럭저럭 재미있다’고 보고 있는 게 틀림없다.

81로 달아난다. 탈출의 동의어 같은 상용의 어깨 짚기. 그런데 여기서 이세돌의 태도를 보라. 공격을 하는 척하다가 86, 88로 싹 넘어가버리지 않는가. 황이중 7단도 아마 좀 놀란 것 같다. 그러나 묘한 일이다. 이 비겁한(?) 행위를 놓고 박영훈 9단은 감탄한 모습이다. “대단히 컸습니다. 어려운 대목인데 참 쉽게 풀어갑니다”라고 그는 말한다. 공세는 취하고 있지만 A로 막히면 귀의 흑도 엷다는 것. 집으로 크게 밀려버릴 위험도 있다는 것. 그래서 86, 88이 대단히 현명했다는 것. 그러고 보니 81은 좀 더 강하게 두어야 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좁지만 ‘참고도’ 흑1로 벌리고 어떻게든 안에서 비비고 사는 게 최대한 버티는 수단이었다는 얘기다.

어느덧 흑은 집에서도 큰소리 치기 어려워졌다. 눈 감고 89로 집을 챙긴 사연이다. 그러자 백의 공격이 다시금 파도처럼 밀려온다. 90의 포위, 그리고 92의 옆구리 찌르기. 그러는 사이 백 집도 슬금슬금 불어나 황이중은 점차 숨이 가빠진다.

박치문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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