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계 유동자금 미국으로 몰려 '국제금융대란' 우려 목소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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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동아시아 금융위기를 계기로 세계 유동자금이 미국으로 몰리며 다시 아시아 각국의 주가 폭락과 통화가치 하락을 심화시키는 악순환 현상을 빚고 있다.

이런 움직임에 불을 댕긴 것은 뮤츄얼 펀드 (우리의 투자신탁에 해당) 를 비롯한 미국의 기관투자가들. 이들은 동남아 각국이 통화위기를 맞아 경제가 흔들리자 투자자금을 급격히 회수하는 대신 활황 상태인 미 증시에 대한 투자를 늘려나가고 있다.

이들은 특히 동남아 통화위기 이후 일본 증시에서도 자금을 빼내 미국쪽으로 돌리고 있다.

이런 움직임은 지난 1~7월 일본 주식시장에서 3조2천억엔 (24조9천6백억원) 의 순매수를 기록했던 외국인 투자자들이 8월 이후 매도세로 돌아선 데서 감지되고 있다.

일본 기관투자가들도 돈을 미국쪽으로 돌리고 있다.

도쿄 주식시장의 전망이 불투명한데다 장기 금리 (10년 만기 국채)가 1.5%대로 사상 유례 없는 최저 수준에 머물러 있어 투자 자금을 미 정부가 발행한 채권쪽으로 쏟아붓고 있다.

환율 변동 위험을 피하기 위한 헤지 비용을 제외하더라도 미 채권 투자는 3%이상의 수익률을 거둘 수 있기 때문이다.

유럽의 기관투자가들도 오는 99년초 유럽 단일 통화 (ECU) 출범을 앞두고 각국 정부의 금리 조정이 빈번하게 이루어지는 등 시장 상황이 불투명하게 되자 미국 금융시장쪽으로 돌리고 있다.

중남미 지역의 이른 바 '택스 헤이븐 (조세 피난처)' 에 거점을 두고 있는 헤지 펀드들 역시 올들어 미 채권 투자에 적극 나서고 있는 데 이들은 최근 아시아 통화위기가 중남미로 번질 가능성이 높아지자 다른 지역의 돈을 빼내 뭉칫돈을 미국쪽으로 이동시키고 있다.

이에 따라 미국의 주식.채권 등 증권시장으로 흘러 들어간 외국 투자자금은 올 상반기만 해도 2천1백68억달러에 이르렀다.

미국이 해외에 투자한 금액을 뺀 순 (純) 유입액은 무려 1천7백97억달러를 기록했다.

금융 관계자들은 동남아 통화위기에 따른 '유동자금의 미국 집중 현상' 이 올 하반기에 본격적으로 시작됐음을 감안하면 올해 순유입액은 그 규모가 사상 최대였던 지난해의 2천8백20억달러를 훨씬 웃돌 것으로 보고 있다.

이에 따라 세계의 유동자금이 미국으로만 몰려 달러화가 실제보다 고평가되고 국제 금융시장이 교란되지 않을까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국제 외환시장에서 달러화는 최근 1달러당 1백25엔대를 돌파했으며 통화위기의 심한 몸살을 앓고 있는 동남아 각국 역시 통화가치가 추가로 더 떨어지는 사태를 걱정하고 있다.

미 국내적으로 가장 큰 고민은 증시 과열로 미국 기업들의 주가에 거품이 커졌다는 진단이 나오면서 어느날 갑자기 '블랙 먼데이' 와 같은 대폭락의 시나리오가 전개되는 것이다.

이들은 미 경제가 현재 인플레 조짐 없이 연 3.5%안팎의 고성장을 거듭하고 있어 최근 주가 상승세가 실물경제의 뒷받침을 받고 있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경기 과열로 인한 인플레가 시작될 경우 주가는 언제든지 하락세로 돌변할 수 있다.

앨런 그린스펀 연방준비제도이사회 (FRB) 의장이 최근 미 국내의 높은 임금상승률로 인한 인플레 확산을 지적함에 따라 사전에 인플레를 잡기위한 금리인상 필요성도 제기되고 있다.

다만 12일 열린 FRB회의에서는 재할인율을 변동없이 그대로 두었다.

미 증시의 주가는 이미 위험수위를 나타내고 있다.

뉴욕 시장의 다우 지수를 놓고 현재 주가수익비율 (PER) 을 따져 보면 약 20배로 나온다.

경험적으로 적정 수준인 12~16배를 크게 웃돌고 있다.

지난 87년 블랙 먼데이 이후 안정세가 계속됐던 부동산가격 상승률도 최근 2년간 5%이상으로 올라가 인플레 기대심리를 부채질하고 있다.

이에 따라 미 증시는 주가가 오를 수록 불안감 또한 높아지는 분위기다.

지난달 홍콩 증시의 주가 폭락에 영향받아 뉴욕 주가가 급락했던 사례는 이를 잘 말해 준다.

경제전문가들은 미국 시장으로 세계 유동자금이 지나치게 몰릴 경우 주식.채권.부동산에 거품가격을 발생시키고 자칫하면 주가 폭락과 함께 세계 금융시장의 혼란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김형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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