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청론]금융위기 해결 실명제 폐지부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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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금융실명제에서 부도유예협약에 이르는 규제적 조치를 고려하지 않는다면 지금의 위기에서 가장 핵심적인 문제는 환율불안이다.

따라서 재정경제원이 환율안정을 제 1차 목표로 삼고 이에 총력 대응하려는 것도 당연하다고 하겠다.

그러나 경제의 기본이 튼튼한데 환율이 아무 이유없이 급등할 수는 없는 일이다.

따라서 외국투자가들이 국내 증시를 떠나는 원인을 환율 급등에서 찾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현 위기는 금융실명제에서 그 근본원인을 찾는 것이 옳다.

실명제를 실시하면서 그 부작용을 없애려고 자금을 풀기 시작한 이후 중소기업을 지원한다는 명목등으로 그동안 통화를 필요 이상으로 공급했고 이로 인해 높아진 물가상승 압력이 금융실명제 효과와 결합되면서 과소비가 부추겨지고 경상수지 적자가 확대됐다.

원화가치가 이에 맞춰 적절히 절하되어야 했으나 때에 맞지 않는 외국자본의 유입으로 오히려 절상추세를 보였다.

경제의 구조조정은 과소비 분위기 아래서 문민정부의 역 (逆) 자유화 정책 때문에 제대로 진행되지 못했다.

특히 현재의 위기조짐이 뚜렷해진 이후에도 재경원은 중앙은행의 독립을 막고 철저하게 감독기능을 재경원 아래에 두려는 무모한 일에 아까운 시간을 모두 소모하고 말았다.

부도유예협약은 이러한 상황에서 문제가 터지자 앞뒤를 제대로 생각하지 못하고 만들어낸 잘못된 조치였다.

이런 경로로 외국전문가가 예상한대로 재경원은 금융 '문제' 로 끝낼 수 있었던 사안을 금융 '위기' 로 만들고 만 것이다.

외국투자가가 일단 전망이 없는 것으로 판단하고 자금회수로 태도를 바꾼 다음에는 원화가치가 절하되지 않을 수 없고 절하가 일단 시작되면 이들의 더 빠른 이탈은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절하경향은 일단 시작되면 반전되는 것이 어렵다는 특징도 있다.

이렇게 본다면 환율안정을 표적으로 한 어떤 대책도 미봉책의 범주를 벗어날 수 없다.

경상수지가 지속적으로 적자를 보이고 있는 상황에서는 환율이 급등하는 것을 막을 방법도 없고 또 그렇게 할 이유도 없는 것이다.

환율이 급격히 올라가는 것은 우리가 그동안 했어야 할 구조조정을 하지 않은 대가로서, 그리고 물가 상승을 묵과한 대가로서 치러야 하는 당연한 고통이다.

이러한 상황에 즉각적 효과를 볼수 있으면서도 장기적 정책방향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 해결책이 하나있다.

그것은 금융실명제를 폐지하는 것이다.

이것은 통화량을 늘리지 않고도 금리를 몇 %포인트 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이렇게 해도 외국 투자가의 투매 영향이 상쇄되지 않으면 이들이 투매하는 주식과 질적으로 같은 수준 이상의 주식에 '임시 적격성' 을 부여해서 한국은행이 매입하는 방법을 추가해야 할 것이다.

지금 문민정부가 할 수 있는 것은 이정도다.

금융개혁 등 근본적 개혁은 4개월 후에 한다고 해서 크게 잘못될 것이 없다.

김한응<한국금융연수원 부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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